노조원 아닌 ‘노동이사’···노동자 편에서 끝까지 싸울 수 있나

반기웅 기자

8월 시행되는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곳곳 구멍

대선 후보 간 합의로 국회 통과 됐지만 주요 쟁점 정리 안 돼
노조 탈퇴 조항 ‘시한폭탄’…사측 거수기·노노 갈등 우려도

오는 8월부터 공공기관 노동이사제가 시행된다. 임원을 선임하는 공공기관 130곳은 노동이사 1명을 반드시 뽑아야 한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해 발언권과 의결권을 갖고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이미 2016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경기도와 인천시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노동이사제를 운용하고 있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시행을 앞두고 지난 10일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공운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시행 대상 기관은 한국전력, 한국가스공사, 한국마사회와 같은 공기업 36곳과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을 비롯한 준정부기관 94곳 등 130곳이다. 노동이사의 자격과 권한, 의무를 명시한 정부 지침도 마련됐다. 정부는 노동이사로 선임되면 노조에서 탈퇴하도록 했는데, 이 같은 지침이 공개되자 노동계 내부에서는 노동이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조합원 자격을 상실한 노동이사는 노조와 단절돼 ‘사측 거수기’로 전락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여야 모두 대선 공약, 국회 통과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은 노동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간 노동계는 노동이사제가 공공기관 지배구조 개선의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도입을 주장했다. 반면 경제계는 노동이사제 도입이 노사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라며 반대해왔다. 전경련 관계자는 “노동이사제가 효율적인 제도인지 의문”이라며 “민간 기업에 노동이사제가 시행되면 이사회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7대와 19대, 20대 국회에서 노동이사제 도입을 담은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계류 끝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기관 노동이사제 도입을 국정과제로 정했지만 임기 말까지 경제계의 반발에 부딪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장기간 표류 중이던 공운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건 대통령 선거에서 주요 후보들이 노동이사제 공약을 내건 덕분이다. 후보들은 저마다의 셈법으로 노동이사제를 찬성했는데, 후보 간 합의가 이뤄지면서 별다른 진통 없이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법은 통과됐지만 노동이사의 선임 절차와 자격, 권한 등 주요 쟁점은 시행령과 후속 조치로 미뤄졌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안은 노동이사의 조합원 자격 유지 여부다. 정부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근거로 노동이사는 노조에서 탈퇴하도록 했다. 현행 노조법은 사업자를 위해 행동하는 자의 노조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데, 노동이사는 임원이기 때문에 ‘사업주를 위해’ 또는 ‘사용자의 이익을 대표해’ 행동하는 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는 조합원 자격을 상실한 노동이사는 이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본다. 박희석 서울시 노사민정협의회 전문위원(전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은 “노조에서 나오면 정책 지원을 받지 못한다”며 “처음부터 완벽하게 교육받은 사람만 노동이사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현안에 대한 분석이나 대응 방향을 앞두고 노조 지원을 받지 못하면 이사회에서 제대로 된 의사 개진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조 탈퇴 강제, ‘갈등 불씨’ 우려

‘노동이사의 노조 탈퇴’ 조치가 노노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1월 노동이사제 입법 기념 토론회에서 “전체 이사 중 소수에 불과한 노동이사가 노동조합과 단절된다면 사용자 측 이해 대변을 위한 수단으로 전략하거나, 고립된 제3의 회색인이 돼 노동이사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며 “노동이사와 노동조합의 단절이 노노갈등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박태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노동이사의 조합원 자격 여부는 후속 시행령과 지침으로 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박 연구위원은 “노동이사의 조합원 자격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프랑스처럼 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되 노조 간부를 맡지 않도록 할 수도 있고, 특수한 사안을 다룰 때 이사회에서 배제하는 스웨덴 방식도 있다”며 “정부 지침으로 자격 여부를 정할 게 아니라 조합원 유지 방식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거쳐 법률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이사의 조합원 자격은 정부 부처 간에도 이견이 있다. 당초 고용노동부는 노동이사의 조합원 자격 여부를 정부 지침에 넣지 말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각 공공기관에서 조합원 자격 관련 사례가 발생하면 사례별로 대응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기재부는 제도 시행 과정에서 발생할 혼란을 막으려면 관련 ‘근거’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세워 관철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이사에게 부여된 권한이 크지 않아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이사는 안건 부의권을 갖지 못한다. 정부는 노동이사의 권한과 의무가 각 공공기관의 일반 비상임이사들과 동일하도록 했는데, 현재 공공기관은 비상임이사에게 안건 부의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재부는 “노동이사에게는 일반 비상임이사와 똑같은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는 게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동이사의 권한은 일반 비상임이사에 미치지 못한다. 당장 노동이사는 일반 비상임위원과 달리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에 들어갈 수 없다. 직원은 공공기관 임추위 위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이때 노동이사는 비상임이사가 아닌 직원으로 분류된다. 사안에 따라 권한이 달리 부여되는 셈이다.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 본부장은 “이제 첫발을 뗀 노동이사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기대를 할 필요는 없다”며 “다만 낙하산 인사와 거수기 이사회라는 오명을 받아온 공공기관 운영에 변화를 촉진하는 마중물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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