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포럼

“진정 바라는가, 기후재앙 부르는 ‘너무 빠르기만 한’ 사회를”

도쿄 | 김경학·이창준 기자

근대 이후, ‘다음 사회’를 대비하라…일본 호세이대 교수 미즈노 가즈오

미즈노 가즈오 일본 호세이대 교수가 지난달 25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도쿄 | 이창준 기자

미즈노 가즈오 일본 호세이대 교수가 지난달 25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도쿄 | 이창준 기자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 가치 추구하는 한 현재는 여전히 ‘근대’…다음 사회의 속성은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
AI 기술은 빠른 사회를 강화하는 현재의 연장 장치일 뿐…갑작스러운 근대 전복에 대비해 다양한 모델 준비해야

미즈노 가즈오 일본 호세이대 교수(70)는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 경제학자다. 증권사 이코노미스트 등을 거친 그는 경제재정 분석을 담당하는 내각부 대신관방심의관, 국가전략실에 해당하는 내각심의관 등 정부에서도 일했다.

여러 저서를 통해 성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성장 신화’를 비판해왔고, 불평등·제로 성장 등 자본주의 체제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해온 미즈노 교수는 2023년 현재를 ‘근대’라 부른다. ‘더 빠르고 더 멀리 더 경제적(합리적)’이라는 근대사회의 속성을 추구하는 한 여전히 근대라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미즈노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최근 세계 경제 흐름과 향후 전망을 물었다. 그는 미·중 갈등과 전쟁으로 탈세계화 흐름이 심화하고, 파시즘이 대두하는 건 수세기 동안 이어진 근대가 끝을 향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포스트 근대사회의 속성은 근대와 정반대인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일 것이라며 더 큰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미즈노 교수와의 주요 문답.

- 지난달 히로시마에서 주요 7개국(G7) 회의가 열렸다. 서구 대 중국·러시아 신냉전 체제로 가는 걸까.

“아무런 문제도 해결 못하고 있다. 신냉전 체제로 가는 흐름은 더욱 명확해졌다. 지금 상황은 (독일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가 말한 16세기 육지와 바다 싸움의 재발로 보인다. 바다의 나라를 대표하는 미국·영국과 육지의 나라인 러시아·중국 구조로 충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근대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아베노믹스에 대해 ‘자본가를 위한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전제부터 잘못됐다. 근대사회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펼친 정책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근대사회의 전제는 우선 공간이 확장돼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시간이 무한하다는 것, 세번째는 국민국가다. 그런데 21세기가 되며 이 전제들이 사라지고 있다. 우선 아프리카까지 세계화되고, 전 세계가 통일된다 한들 그 이상으로 공간이 확장될 수 없다. 그러니 다들 달이나 화성에 가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극소수는 화성에 기지를 만들고 우아하게 사는 게 가능할지 몰라도 70억~80억명이 이주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시간이 영원하다는 건 변함없다. 시간이 영원하다는 건 진보, 혁신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혁신이 공헌하는 정도가 적어지고 있다.”

- 결국 현재 패러다임, 다시 말해 근대사회가 종말을 향한다는 것인데 그다음은 어떤 사회인가.

“근대사회라는 건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더 멀리’를 지향한다. 시간이 무한이니까 어쨌든 간에 빠르게, 그리고 무역으로 전 세계 어디로든지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단돈 1엔이라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더 합리적’을 중시한다. 이 세 가지를 행동원리로 충실히 이행한 사람이 근대사회의 성공한 사람, 혹은 성공 기업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제 한계에 왔다. 한계가 오면 완전히 반대의 것을 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오른쪽, 아니면 왼쪽으로 트는 건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완전 반대로 하면)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으로’일 것이다. 이들을 행동원리로 한 사회를 어떻게 부를지는 22세기 후세 사람들이 정하지 않을까.”

- ‘포스트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새 모델’이라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지금 모순이 많다. 일본에는 억만장자도 있지만 연수입 200만엔 이하인 노동자가 1000만명이 넘는다. 싱글맘의 상대적 빈곤율은 50%가 넘고 빈곤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사회주의라는 라이벌이 없어지니 자본주의가 원래 갖고 있던 문제가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라이벌이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자신의 문제점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라이벌이 없어지면서 모순은 해결하지 않고, 원래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그 본성을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수정하더라도 무리라고 본다. 앞서 말한 행동원리,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으로’ 나아가는 모델이 새 모델이다.”

- 인공지능 기술이 더 여유롭게, 더 가까이, 더 관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까.

“그 반대다. 인터넷·인공지능 같은 건 ‘더 빨리’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본 물류회사들은 요즘 아침에 주문하면 낮에 도착시키는 데 안달이다. 아침에 주문한 물건이 낮에 도착하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3일 만에 도착해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 극소수를 위해 수많은 트럭이 줄줄이 달리는 꼴이다. 업체들이 공동으로 트럭을 운영해 3일에 한 번 달리게 한다면 탄소 배출 등 모든 것들이 3분의 1로 줄어든다. 인공지능이 근대사회를 끝낼 수 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공지능은 사실 근대사회의 속성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챗GPT는 기계한테 답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지 않나. ‘더 빨리’를 강화하는 근대사회의 연장일 뿐이다.”

- ‘성장, 기술 혁신이 모든 걸 해결한다’는 이른바 성장 신화가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일본을 앞질렀다. 지금 일본의 1인당 GDP에도 부족한 게 거의 없다. 학생들에게 물어도 딱히 갖고 싶은 걸 말하지 않는다. 방금 말한 물류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한 사회라는 건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어디서든 가질 수 있는 사회’다. 조금만 걸으면 편의점이 있고 온라인 주문하면 곧바로 배달해주는, 일본은 사실상 그렇게 됐다고 생각한다. 한국도 그렇지 않나. 탈성장을 논하는 게 너무 이르다 생각한다면 지금보다 더 빠른 사회를 진정 원하는지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편의점을 지금보다 배 이상 늘린다든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온라인 주문한 택배가 ‘어제’ 도착해 있기를 진정 원하는 건지. 불가능할지 몰라도 인공지능은 어제 도착해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 할 거다. 당신의 행동 패턴을 토대로 보니 이런 물건을 원할 거니까 1시간 전 현관 앞에 미리 갖다 뒀다고. 이런 빠른 사회를 정말 원하는지 논의해본다면 ‘더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명확해질 거다. 성장으로 얻은 그 이익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도 묻고 싶다. 아마도 그 이익을 쓰는 목적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자기증식이다.”

- 한국에선 노동시간과 관련한 논의가 뜨겁다.

“장시간 노동하는 이유는 경제성장을 위해 더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라는 건 풍요로워지기 위한 중간 수단으로 자유와 기회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아이들이 충분히 교육받을 기회를 얻으려면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하는 것이다. 현재를 인내해 장래의 풍요로움을 얻는 ‘트레이드 오프’(하나를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걸 포기해야 하는 관계)였다. 지금의 일본은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졌다. 그렇다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편이 맞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것을 어디에서나 가질 수 있는 환경이라 노동시간을 줄이는 편이 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인권, 자유, 생산성도 올라간다.”

- ‘필요한 것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도착하는’ 사회가 가능한 건 글로벌 사우스를 착취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또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 국가가 여전히 성장을 외치다보면 기후위기가 더 악화할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지구 전체가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미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시점에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사우스의 사람들이 일본이나 한국·독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욕구다. 그 목표를 향해 간다면, ‘더 빨리 더 멀리 더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선진국들이 ‘지구의 지속성을 생각해서 너희들도 조금 더 천천히 성장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생활수준을 상당히 떨어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탄소 배출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소비량도 반감해야 한다. 세계 인구의 70%인 비선진국을 위해서라도 선진국들의 생활은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된다. 다만 그렇게 되면 선진국 내부 정치인들이 지지를 받지 못한다. 선진국의 정치인들이 ‘세계 수준 반감’ 같은 걸 내걸면 바로 선거에서 지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 앞서 말한 ‘육지 대 바다’뿐 아니라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의 자국우선주의 등 내부 분열도 일어난다. 해결책은 없을까.

“바다의 나라라는 건 시장 확장을 통한 자본 획득이 목표인 나라들이다. 획득한 자본이 상위 1%에게 집중돼 미국에선 약물·알코올 중독 등에 따른 ‘절망사’가 굉장히 늘고 있다. 국가를 지탱하는 중간층이 점점 추락하는 양상이다. 바다의 나라 안에서도 자본주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싶다면 과거를 참고하면 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기 직전 기독교 세계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존 위클리프나 얀 후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 뒤 마르틴 루터가 나타났다. 첫 반란은 다 진압됐다. 그래서 지금 바다의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처음에는 진압될지 몰라도 그 원인을 제대로 규명해 대처하지 않는다면 근대사회는 전복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에 올 사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전복이 일어나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언제일지 몰라도 지금부터 차근차근 다양한 모델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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