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태광그룹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빌딩의 모습. 연합뉴스.

태광그룹 사무실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흥국생명 빌딩의 모습. 연합뉴스.

2014년 7월 태광그룹 계열사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그룹 내 ‘시너지’를 확대한다는 명목으로 열린 이 회의에서 태광 경영기획실은 각 계열사 대표에게 메르뱅에서 와인을 구매하도록 독려했다. 메르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의 부인과 딸이 소유한 회사였다. 이후 설과 추석 등 명절마다 태광 임직원에게 지급됐던 선물은 도서 문화상품권에서 와인으로 바뀌었다.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결과, 계열사들이 메르뱅에게 사들인 와인만 46억원어치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5월 태광그룹 계열사인 티시스는 19개 계열사에 김치 구매 물량을 배정했다. 티시스가 직접 계열사를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 회장과 아들, 딸 아내 등이 지분 100%를 가진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구매 물량을 배정하기 1년 전인 2013년에는 이미 배추김치를 호텔 김치 가격 수준으로 올렸다. 2014∼2016년 태광 계열사들이 ‘티시스’에서 생산한 김치 512t을 시가보다 비싼 95억5000만원에 사들였다.

이는 2019년 3월 공정위가 작성한 총수에 대한 부당한 이익을 제공한 태광 계열사와 이 전 회장에 대한 고발결정서에 담긴 내용이다.

공정위는 당시 태광그룹이 사용한 ‘시너지’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실제 조사 결과, 그룹 시너지는 태광 경영기획실이 설치된 주요 목적 중 하나로 그룹 내부가치 제고를 위한 계열사 간 협력 강화를 의미했다. 각 계열사에 외부 회사와의 거래와 계열사 간 지원 활동에 대해 사전 협의나 사후보고를 하고, 성과평가 지표로도 활용했다.

이에 공정위는 시정명령과 과징금 부과에 더해 태광 계열사뿐 아니라 이 전 회장도 검찰에 고발했다. 횡령 혐의가 드러나면서 이 전 회장이 경영일선에 물러났지만 경영기획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감 몰아주기에 관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재무 상황을 보고받거나 거래에 지시·관여한 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달콤한 일감 몰아주기의 유혹

2014년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도입된 이후, 공정위는 잇달아 제재에 나섰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기업은 법의 구멍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이는 일감 몰아주기 혜택은 달콤한 것에 비해 최종 수혜자인 총수 일가의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정위는 총수 일가의 지시나 관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나 실무자를 고발하는 데 그쳤다. 고발하더라도 태광 건처럼 검찰이 기소하지 않거나 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점도 이런 경향을 부추겼다.

경제개혁연대 분석에 따르면 2020년 이후 공정위는 기업집단 8곳(미래에셋·금호아시아나·하림·SK·한국타이어·호반건설·OCI·세아)의 일감 몰아주기를 제재하면서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을 제외하고 총수 일가에 대한 개인 고발을 하지 않았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연합뉴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연합뉴스.

공정위가 규제 집행에 미진하면서 대기업들은 일감 몰아주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감 몰아주기를 승계의 도구로 쓰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우선, 출자나 신주배정을 통해 총수 일가가 최대 100%까지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를 만든 뒤, 그 회사에 그룹 차원에서 일감을 몰아줘 가치를 끌어올렸다. 이후, 계열사 가치가 커졌을 때 그룹 내 주력 계열사와 합병을 추진했다. 주력 계열사의 지분을 사들이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이런 방법으로 간접적으로 지분을 늘린 셈이다.

하림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공정위는 김흥국 하림 회장이 장남인 준영씨에게 하림의 사실상 지배회사인 올품(구 한국썸벧판매)의 지분 100%를 증여한 이후 올품에 부당 이익을 안겨 왔다고 판단했다. 애초 공정위는 총수 일가 고발을 검토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당시 공정위는 “그룹 회장이 동물약품과 사료첨가제 통합구매에 있어서 고가매입이나 과도한 중간 마진 지급을 지시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캐시카우(현금 창출) 역할을 위해 일감 몰아주기를 시도하는 때도 있다. 전직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승계 이외에도 총수의 친인척에 안정적인 수익을 챙겨주기 위해 일감 몰아주기를 활용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관여’에 대해 폭넓게 해석한 대법원

그러나 최근 대법원에서 태광그룹 사건에서 일감 몰아주기 ‘관여’에 대해 폭넓은 해석을 내놓으면서 그동안의 소극적인 제제에도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3월 대법원은 “특수관계인이 계열회사의 임직원 등에게 부당한 이익제공행위를 장려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놨다. 또 “특수관계인이 해당 거래의 의사결정 또는 실행과정에서 계열회사의 임직원 등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제공행위와 관련된 보고를 받고 이를 명시적·묵시적으로 승인한 경우에도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룹을 지배하는 총수가 직접 실무자에 일감 몰아주기를 지시하는 경우 자체는 드물다. 특히, 법적인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 등기이사를 맡지 않는 관행에 비춰보면 총수가 직접 일감 몰아주기 의사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태광의 경우처럼 일감 몰아주기를 장려하는 태도를 보이거나 총수가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 보고 받았다면 묵시적인 승인을 한 것으로 대법원이 간주함에 따라 적극적인 제재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공정위도 이런 대법원 판례를 반영해 지난 10월 일감 몰아주기 고발지침 개정안을 행정 예고했다. 일감 몰아주기에 참여한 사업자의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해 사업자를 고발하는 경우, 이에 ‘관여’한 총수 일가도 원칙적으로 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공정위의 이 전 회장 고발 건은 검찰의 불기소로 결론이 났지만, 이 전 회장과 흥국생명 등 태광 계열사 19곳이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취소 행정소송에서는 대법원이 관여를 폭넓게 판단함에 따라 다소 추상적이었던 고발 기준을 명확히 한 셈이었다.

백기 든 공정위···시민단체는 “총수 일가에 직접 과징금 부과해야”

그런데도 한국경제인협회 등 재계 단체가 크게 반발하면서 결국 고발지침 개정안은 백지화됐다. 고발지침에서 관여 여부에 대한 명백한 입증 없이 총수 일가를 원칙적으로 고발하는 것은 상위법인 공정거래법에 위배 된다는 게 재계의 입장이었다.

개정안이 ‘기업 옥죄기’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정위는 결국 ‘법 위반 정도가 중대한 법인의 사익편취 행위에 지시·관여한 특수관계인도 원칙적으로 같이 고발한다’는 내용을 삭제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구 전경련) 회관 앞 휘호석. 연합뉴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한국경제인협회(구 전경련) 회관 앞 휘호석. 연합뉴스.

공정위가 백기를 들면서 고발 지침보다 사익편취 심사지침을 개정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사익편취 심사지침을 통해 총수 일가의 지시와 관여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을 먼저 제시해야 함에도 고발 지침부터 먼저 손을 대 불필요한 논란만 가중시켰다는 지적이다.

공정거래법 한 전문가는 “고발지침은 일감 몰아주기뿐 아니라 다른 공정거래법 위반에도 적용이 된다”며 “대법원 판례를 반영하려면 사익편취 심사지침을 개정해야 했다”고 했다.

공정위가 과거처럼 총수 일가 고발에 소극적으로 나설 경우, 일감 몰아주기 관행은 지속될 수 있다. 이에 시민단체에서는 일감 몰아주기 이익이 결국 총수 일가에 돌아가는 만큼, 더 촘촘한 규제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징금 규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경제개혁연대는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직접적인 거래 주체에 대해서만 과징금을 부과한다”며 “총수 일가에 대한 과징금 부과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총수 일가 개인이 직접 일감 몰아주기 거래를 하지 않는 이상 총수 일가가 일정 지분을 소유한 계열회사에 대해서만 과징금이 부과된다. 경제개혁연대 정책위원인 노종화 변호사는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총수 일가이기 때문에 직접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위헌적이라거나 과도한 제재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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