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포스코 사옥. 연합뉴스.

포스코 사옥.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9일 새벽 1시. 박희재 포스코홀딩스 최고경영자(CEO)후보추천위원장은 짤막한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독립적으로 차기 회장 심사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며 “현 회장의 3연임 지원은 개인의 자유”라는 내용이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냈던 이유는 전날 국민연금공단이 언론을 통해 포스코 그룹의 차기 회장 선출 절차에 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제동을 걸어 차기 회장 선출을 원점에서 재시작해야 했던 ‘KT 사례’를 거론하면서 “주주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내·외부인 차별 없는 공평한 기회가 부여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CEO후추위를 구성하는 사외이사들이 최 회장 재임 중 선임됐거나 연임됐다는 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최 회장 체제에서는 임명된 사외이사들인 만큼, 최 회장의 3연임을 지지하거나 최 회장과 연계된 인물로 차기 회장을 선임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추측이었다.

6년 동안 포스코 주총서 반대표 ‘2번’ 던진 국민연금

국민연금은 포스코홀딩스 지분을 6.71% 가진 최대주주인 만큼 당연한 문제 제기로 볼 수 있다. 특히, 최근 경찰이 포스코그룹 지주사인 포스코홀딩스 이사회의 ‘호화 해외 출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서 이런 문제 인식은 더욱 공감을 받고 있다. 당장, 재계 안팎에선 포스코그룹 차기 회장 선임 절차가 외풍에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관치 그림자’에 대한 의구심도 점점 짙어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유독 소유 분산기업의 ‘CEO 교체기’에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경영에 무관심했다가 CEO에 자기 사람을 앉히겠다는 의도로 읽힐 수 있다.

실제 국민연금은 그동안 포스코홀딩스 사외이사 선임을 할 때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국민연금의 주주권을 행사한 내용을 보면, 최 회장의 임기가 시작된 2018년 7월 이후, 지금까지 포스코홀딩스(2022년 1월 분할 전 포스코 포함)에 6번 주주총회에 참석해 53번 의결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은 투자대상 기업의 보유 지분율이 10%가 넘거나 국민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 비중에서 1% 이상 비중을 차지한 기업 등을 골라 사전에 의결권 행사 내역을 밝힌다.)

이 가운데 반대표를 던진 것은 단 두 차례였다. 2020년 당시 사외이사 선임 시, ‘이해관계로 인한 독립성 훼손 우려’를 이유로, 2023년 ‘서면 투표에 의한 의결권 행사 폐지’에 대해서만 반대표를 행사했다. 현재 포스코홀딩스에 재직하는 사외이사들이 선임될 때에는 국민연금은 모두 찬성했다.

일반적으로 주식회사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통해 CEO를 결정한다. 회장 임기에 맞춰 기존 사외이사들이 모두 퇴진하고 새 사외이사들이 뽑힌 뒤 새로운 회장을 선출했던 KT 사례가 오히려 매우 이례적이다. 정부가 민영화된 공기업 CEO 인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지점이다.

지난해 새로 꾸려진 KT 이사회에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각각 고위직을 지낸 윤종수 전 환경부 차관, 최양희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사외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을 지낸 이강철 사외이사,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정책수석을 맡았던 김대유 사외이사는 교체됐다.

절반 넘는 기업 사추위에 사내이사 참여

몇 차례의 회의 참석에 평균 수천만원의 연봉을 받는 만큼 사외이사는 교수나 퇴직 공직자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2억원에 가까운 연봉을 주는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은 ‘장관급’ 타이틀이 있어야 할 정도로 사외이사 내에서도 서열이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사외이사는 거수기라는 오명을 떠안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5월 1일부터 1년간 이사회에 안건으로 오른 7837건 중 원안대로 가결된 건 99.3%에 해당하는 7782건에 달했다. 나머지 55건은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았는데, 이 중 사외이사가 반대한 안건은 16건(0.2%)에 불과했다. 이사회에 올라온 안건이 사전에 조율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그렇다면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업들은 사외이사를 뽑으려면 이사회 내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의 추천을 받아야한다. 현행 상법은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상장기업에 대해 사추위의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사외이사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일종의 장치인 셈이다.

국민연금. 연합뉴스

국민연금. 연합뉴스

그러나 사추위에 대표이사나 지배주주가 참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경향신문이 시가총액 상위 5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상반기 기준 절반이 넘는 27개 대기업 사추위에 현직 임원이 참여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의 경우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직접 참여했다. 사추위에 대표이사나 지배주주가 참여하면 아무래도 기업에 우호적인 사외이사 임명 가능성이 커진다. KT도 지난해 하반기 지배구조 개선안을 마련하기 전까지 사추위에 사내이사 1명이 포함돼 비판을 받았다. 포스코도 2021년 6월에서야 사내이사가 사추위에서 빠졌다.

소유분산기업 이사회 ‘셀프연임 차단’ 해야

특히, 지배주주가 있는 기업보다 소유가 분산된 기업에서의 이사회 역할이 더 중요하다. 주식이 광범위하게 분산돼 경영 성과를 내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더라도 ‘셀프연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관 투자자들이 주주 자격으로 적극적으로 경영에 목소리를 내는 추세를 고려하면 사외이사 자격 논란은 앞으로도 자주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결국 이사회 독립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가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는 “사외이사를 뽑을 때 주주 추천을 대폭 확대하는 등 실질적으로 주주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외이사가 뽑힐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CEO 선임과 연임 절차를 엄격하게 감시하고 제한하는 ‘CEO 승계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지난해 열린 한국ESG기준원 주제로 열린 ‘국내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현황 및 개선방안 모색’에서 김형석 한국ESG기준원(KCGS) 정책연구본부장은 ‘CEO 승계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내부에서 CEO 선임 절차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 기업들이 경영 승계 정책, 후보에 대한 객관적 검증 방법, 확인 절차 등을 마련하고 이를 투명하게 공시하도록 제도적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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