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의 기업본색
※대한민국보다 대한민국 기업이 더 유명한 세상입니다. 어느새 수 십조원을 굴리고 수 만명을 고용하는 거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밖에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상영의 ‘기업본색’은 기업의 딱딱한 보도자료 속에 숨겨진 행간의 의미를, 공시자료의 수많은 숫자 안에 가려진 진실을 추적하는 경향신문 칸업(KHANUP) 콘텐츠입니다. 더 많은 내용을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연초부터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잇따라 금융투자 시장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렸던 기업들은 만기가 가까워지자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높여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대출을 받았다. 실적에 자신 있는 일부 기업들은 대규모 유상증자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달 23일 CJ ENM도 만기가 돌아오는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회사채 발행에 나섰다. 2년 만기 회사채 700억원, 3년 만기 회사채 1300억원 등 총 2000억원을 발행할 예정이었다. 2년 만기 회사채에는 1550억원의 자금이 몰리며 무난하게 회사채 발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3년 만기 회사채는 매수 주문이 1250억원에 그쳐 미달이 났다. 추가 청약을 통해 나머지 50억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지만, 발행 금리는 민평금리(민간 채권 평가사들이 평가한 기업의 고유 금리)보다 29bp(1bp=0.01%포인트)나 높았다. 이자를 더 줘 돈을 빌린 셈이다. 올해 회사채 발행에 성공하지 못한 첫 사례였다.

같은 날 CJ ENM 신용등급 (AA-)보다 훨씬 낮은 SLL중앙(BBB)도 회사채 발행에 무난히 성공한 것과 비교하면 충격적인 결과였다. 재계 자산순위, 13위 ‘CJ그룹’의 주력 계열사라는 후광효과가 있는 CJ ENM이 회사채 흥행에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실적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류 원조’

CJ ENM의 지난해 3분기 보고서에 회사채 ‘흥행실패’의 답이 있다. 이 회사의 3분기 매출은 연결 기준, 3조1087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6.6% 감소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733억원 적자로, 1년 전(1308억원) 대비 2000억원 넘게 줄었다. 한 마디로 CJ ENM은 지난해 장사를 못했다.

재무 안전성도 좋지 않았다. CJ ENM 부채 비율은 153.0%로 전년 대비 15.2% 포인트 증가했다. 차입금 총액은 3조3691억원으로 2022년(3조4587억원)보다 약 896억원이 감소했지만, 1년 내 갚아야 할 유동성 차입금(1조5129억원)이 현금·현금성 자산(7618억원)보다 두 배나 많았다.

CJ ENM은 운영자금 조달을 위해 자회사인 OTT 업체 티빙과 600억원 단기 차입 계약을 지난해 6월 체결하기도 했다. 창립 이래 단 한 번도 흑자를 올리지 못한 티빙에 손을 벌릴 정도로 회사 상황은 어려워졌다. 결국 회사채 발행 흥행에 실패한 데는 이런 경영 상황 악화에 따른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CJ ENM 수익 악화는 예견됐다. 이 회사의 매출 양대 축인 ‘미디어 플랫폼’과 ‘영화·드라마’ 사업이 모두 부진했기 때문이다. tvN, TVING 등 미디어 플랫폼은 2023년 1∼3분기 기준, 653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경기둔화에 따른 광고 업황 부진 여파로 관련 매출이 모두 줄어든 영향이 컸다.

서울 용산구의 한 영화관에 예매 현황이 게시돼있다. 한수빈 기자

서울 용산구의 한 영화관에 예매 현황이 게시돼있다. 한수빈 기자

같은 기간 영화·드라마 부문도 922억원 영업 적자가 났다. 지난해 1∼9월 영화 전체 관객 수는 9389만명으로 전년 동기(8605만명) 대비 9.1%(784만명) 늘었다. 코로나19로 침체된 국내 영화 산업이 회복하고 있지만 같은 기간 CJ ENM이 배급한 영화 관객 수는 606만명으로 전년 동기(1128만명) 대비 반 토막 가까이 났다. 관객 점유율도 2022년 13.1%에서 지난해에는 6.5%로 줄었다. 지난해 CJ ENM이 투자·배급한 영화 <유령>, <카운트>, <더문>,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 모두 흥행에 실패한 결과였다.

국내 최초 아레나 공연장인 CJ라이브시티 사업이 표류하는 점도 회사의 발목을 잡았다. CJ라이브시티는 2021년 4분기 착공했지만, 여러 차례 사업계획이 변경되면서 착공이 늦어지고 사업 비용은 불어났다. 지난해 4월 인건비, 건자재 인상 등으로 한화건설과 공사비 재산정 논의에 들어가며 공정률은 17%에서 멈췄다. CJ ENM이 CJ라이브시티에 지급 보증한 규모가 3000억원을 넘는 점을 고려하면 개발사업이 좌초될 경우, 자칫 CJ ENM의 재무 안정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다.

환승연애·프로야구로 실적 개선 기대

다만, CJ ENM의 올해 실적을 바라보는 눈은 나쁘지 않다. 티빙이 지난해 12월 구독료를 평균 20% 올린 데다 ‘환승연애3’는 신규 유료 가입자를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승연애3’는 드라마 대비 제작비가 낮아 수익성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환승연애3. 티빙제공.

환승연애3. 티빙제공.

여기에 티빙은 프로야구 중계권도 확보했다. KBO리그 경기 온라인 생중계에 하이라이트 장면을 모아둔 주문형비디오(VOD), 스트리밍 재판매 권리까지 확보했다. 핸드폰을 통해 야구를 보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점을 고려하면 관련 수익은 가파르게 올라갈 전망이다. 이화정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적자 자회사였던 티빙의 콘텐츠 효율성 강화와 구독료 인상 효과로 적자 축소가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2022년 약 1조원에 CJ ENM에 인수됐던 미국 제작회사 피프스시즌의 실적 개선도 기대되는 점이다. 안도영 한국투자 연구원은 “피프스시즌은 지난해 헐리웃 파업으로 콘텐츠 납품이 지연되며 적자가 확대됐다. 올해는 연간 20편을 목표로 콘텐츠 제작과 납품이 재개된다”며 목표주가를 12% 상향했다.

그러나 CJ ENM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동시에 존재한다. 일부 사업군에서 경영실적 개선이 예상되지만 강한 성장세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에는 CJ ENM을 넘어, CJ 그룹 전체의 성장 둔화세에 대한 의구심이 깔려 있다.

CJ CGV 유상증자 과정에서 그룹이 주주들에게 신뢰를 잃기도 했다. 대규모 유상 증자를 하면서 최대주주인 CJ가 신주인수권을 대거 포기했기 때문이다. 48.5% 지분을 가진 CJ는 주주배정에 따라 2488억원을 들여 3260만주를 배정받을 수 있었지만 600억원어치만 인수하겠다고 밝혔다. 지분가치가 낮아지는데다 최대주주마저 참여하지 않은 유상 증자인 만큼 주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왼쪽)이 지난달 10일 서울 용산구 CJ올리브영 본사에서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CJ그룹 제공

이재현 CJ그룹 회장(왼쪽)이 지난달 10일 서울 용산구 CJ올리브영 본사에서 직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CJ그룹 제공

법원도 CJ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CJ는 보유 중인 CJ올리브네트웍스 지분 100%를 현물 출자해 CJ CGV 지분을 확보하겠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법원의 불인가 결정으로 제동이 걸린 것이다. 법원은 CJ올리브네트웍스의 주식 가치가 과대 평가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현물 출자 가액에 대한 회계법인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러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CJ는 좀처럼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로, 11월 말 단행됐던 CJ 정기 임원인사가 해를 넘기는 점도 그룹이 처한 위기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재현 CJ 그룹 회장은 지난해 11월 모친인 고 손복남 고문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경영진에게 “그룹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온리원 정신을 되새기는 책임감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절실함을 가져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인사를 비롯해 이 회장의 ‘절실한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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