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생산’만 보는 뜬구름 정부 정책…‘먹거리 시스템’ 봐야 탄소중립 가능

김한솔 기자
제주 서귀포시에 사는 농민 부희성씨가 자신의 감자 밭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가을 닥친 이상 고온 현상으로 부씨가 심은 감자 대부분이 새순을 틔우지 못하고 비닐 안에서 썩어버렸다. 권도현 기자

제주 서귀포시에 사는 농민 부희성씨가 자신의 감자 밭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해 가을 닥친 이상 고온 현상으로 부씨가 심은 감자 대부분이 새순을 틔우지 못하고 비닐 안에서 썩어버렸다. 권도현 기자

충남 서산시에서 농사를 짓는 전량배씨가 2020년 8월9일에 쓴 영농일기(매일의 농사활동을 기록하는 일기)에는 짧고 무거운 한 줄이 적혀 있다. ‘긴 장마. 전국적으로 내리는 폭우… 기후변화. 기후위기….’ 그보다 일주일 전 일기에 띄엄띄엄 적혀 있는 단어에도 전씨의 고민이 묻어난다. ‘늦장마. 집중호우. 강한 바람… 곳곳 침수, 붕괴… 옥수수 대부분 쓰러짐.’

그해 장마는 역대 가장 길게 이어졌다. 전씨의 옥수수밭이 있는 중부지방에는 54일간 비가 내렸다. 수확을 앞두고 있던 옥수수들이 집중호우에 쓰러졌다. 그해 전씨의 옥수수 수확량은 평년의 10%에 불과했다.

“원래 옥수수가 150망쯤은 나오는데 그해에는 15망만 나온 거예요. 고정적으로 옥수수를 주문하는 고객이 60~70명쯤 되는데,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더니 잘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람에 옥수숫대가 쓰러진 사진을 보냈더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깜짝 놀라요. 도시에 사는 분들은 장마가 오면 그냥 ‘하수구가 역류하지 않을까’ 정도만 걱정하는데, 농작물은 엄청 피해를 봐요.”

농민 전량배씨가 2020년 8월9일에 쓴 영농일기. 역대 가장 긴 장마를 보낸 전씨가 당시 쓴 일기에 ‘기후변화, 기후위기’라는 글씨가 보인다. 권도현 기자

농민 전량배씨가 2020년 8월9일에 쓴 영농일기. 역대 가장 긴 장마를 보낸 전씨가 당시 쓴 일기에 ‘기후변화, 기후위기’라는 글씨가 보인다. 권도현 기자

옥수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후위기가 심해져 집중호우 등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이 계속될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지금처럼 풍요로운 식탁을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2019년 발표한 ‘기후변화와 토지’ 특별보고서에서 기후변화가 이미 ‘식량안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처럼 전 세계가 많은 탄소를 배출하면 극한 기후 현상의 규모가 커지고 빈도도 늘어나면서 식량 공급의 안정성은 크게 떨어진다. 식량 가격이 급등하고 식량 수급 불안정과 기근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는 탄소 감축을 위한 여러 계획을 내놓고 있다.

전씨의 경우처럼 기후위기의 피해를 크게 보는 농업이나 축산업도 탄소를 배출하기는 마찬가지다. 에너지나 제조업 분야처럼 농축산업도 탄소 감축이 필요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농축산업 부문의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식량 ‘생산’ 영역의 탄소 감축을 넘어 가공과 유통 등을 포괄한 ‘먹거리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탄소중립 제주, 미리 가 본 미래’ 6화에서는 그동안 나온 농축산업 부문의 탄소중립 정책을 짚어보고, 나아가 두 산업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도 살펴본다.

농민 정산진씨가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고 있는 작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농민 정산진씨가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키우고 있는 작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준헌 기자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농민들

땅과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농민들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매년 체감한다. 지난해 여름에는 장마 때 비가 거의 내리지 않더니, 가을로 접어들자 잦은 비와 함께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났다. 9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평균기온이 20.9도로, 역대 가장 높았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에 사는 농민 부희성씨도 계속 농사를 지어도 될지 의문이 생길 정도로 더위 피해를 봤다고 했다. “감자는 원래 8월에 심어야 돼요. 그런데 작년에는 비가 너무 와서 9월 말에 심었는데, 10월에 고온 현상이 오니까 다 썩어버리더라고. 비 그치면 덥고, 그러다 또 비 내리니까 발아 자체가 안 된 거지. 감자순 나온 게 30%도 안 돼요.” 부씨와 같은 동네에 사는 농민 현진희씨도 최근 2년간 파종 시기를 한 달 반 넘게 늦췄다. “제주는 밭에 수분이 없어야 밭을 갈고 파종을 하는데, 한 2~3일 비 오고, 밭 마를 때쯤 되면 또 2~3일 비 오고… 파종하려고 하면 비가 와서 흙이 쓸려나갔어요.” 그도 작년에 더위 피해를 입었다. “10월 중순부터 찬 바람이 불어줘야 작물이 웃자라지 않거든요. 그런데 작년은 11월까지도 너무 따뜻한 거예요. 제주도는 오는 3월20일쯤부터 양파를 수확해야 하는데, 작년에 심은 게 이미 웃자랐어요. 양파가 웃자라면 양파 가운데를 잘랐을 때 ‘쌍알’이라고 하는 동그란 모양이 두 개 나오는데, 그건 못 팔아요, 비상품이에요.”

충남 홍성군에서 유기농업을 하는 정상진씨는 4년 전 폭염 때문에 계약재배한 양배추를 제때 납품하지 못했다. 2018년은 한국에서 기상 관측 이래 최고 기온인 41.5도가 기록됐던 해다. 그해 정씨의 양배추 모종은 밭에서 다 녹았다. “3.3㎡(1평)에서 작물 20㎏이 생산된다는 게 공식처럼 돼 있거든요. 그래서 계약 물량의 20% 정도 더 심으면 공급에 안정적일 줄 알았는데, 모종이 다 녹아 없어지다보니 계약한 것의 15%밖에 생산을 못해 많은 타격을 받았죠.”

폭염과 집중호우가 반복돼 고온다습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병충해도 늘고 있다. 서귀포 현진희씨의 브로콜리 밭에는 12월에도 나방이 날아다녔다. 홍성의 정상진씨는 날씨가 과거와 달리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 일부 작물은 노지보다는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한 비닐하우스에서 짓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안정적으로 하려면 비닐하우스에서 하는 게 좋죠. 고추도 노지에서 빨갛게 달렸어도 하루아침에 병이 싹 쓸어가는 경우가 있어서요. 아직까지도 고추를 노지에 재배하는 곳들이 있긴 한데, 그건 위험 감수하고 하는 거고요. 하지만 비닐하우스에서 하면 시설비가 많이 들죠.”

농축산업이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선 기후위기를 막아야 한다. 탄소배출을 줄여야 한다. 한국의 탄소 배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2018년 기준으로 에너지(86.9%)와 산업공정(7.8%) 부문이다. 농축산업에서 한 해 동안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2220만t으로 전체의 2.9%다. 폐기물과 탈루 등 기타 배출을 제외하면 모든 부문 중 배출량이 가장 적다. 그렇다면 농축산업에서는 탄소 감축 정책이 필요 없는 것일까. ‘전체 시스템’의 관점에서 본다면, 꼭 그렇진 않다.

충남 홍성군에 사는 농민 정상진씨가 축사에서 소에게 볏짚을 먹이고 있다. 정씨는 소에게 먹일 사료 작물을 직접 재배하는데, 최근에는 날씨가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지면서 일부 작물은 노지에서 키우기가 어려워졌다. 이준헌 기자

충남 홍성군에 사는 농민 정상진씨가 축사에서 소에게 볏짚을 먹이고 있다. 정씨는 소에게 먹일 사료 작물을 직접 재배하는데, 최근에는 날씨가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지면서 일부 작물은 노지에서 키우기가 어려워졌다. 이준헌 기자

농업도 탄소를 배출한다

“탄소는 공장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지.” 양임복씨는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이장협의회장이다. 그는 지난해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을 초청해 마을 이장단을 상대로 농축산업의 탄소중립 정책에 관한 강연을 열었다. “강연을 들은 분들의 반응은 ‘쇼킹했다’는 것이었어요. 논물은 많이 댈수록 좋은 것 아닌가 생각했던 분들도 있고, 축산에선 악취만 난다고 생각했지 탄소 배출과 연관해서는 몰랐던 것 같아요.” 마을 사무장인 곽순자씨도 그날 강연을 들었다. 그는 벼농사를 많이 하는 전남 출신이다. “농업에서 가장 탄소 배출이 많은 건 벼라고 하더라고요. 처음 알았어요.”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과정에서도 탄소는 배출된다. 2018년 농축산업에서 배출된 온실가스 2220만t 중 630만t은 벼 재배에서, 550만t은 농경지 및 토양에서 나왔다. 벼 재배 때는 논물 안에서 유기물이 분해되면서 메탄이 나오고, 농경지에서는 투입된 비료와 분뇨에서 아산화질소가 나온다. 축산 부문에서는 가축의 분뇨 처리 과정에서 490만t, 소가 소화를 시키며 트림을 하는 등의 장내 발효 과정에서 450만t의 온실가스가 배출됐다. 농기계 사용 등으로 인한 농축산업 ‘에너지’ 부문에서도 100만t의 탄소를 배출했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친환경 농업을 하면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작물(식물)이 광합성을 하면서 흡수하기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은 사실상 ‘0’일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꼭 그렇진 않다. 이근행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장은 “작물을 기를 때 분명히 탄소를 흡수하는 과정이 있다. 하지만 한해살이 농사는 1년도 안 키우고 바로 뽑아서 먹거나 가공을 하는 것이어서 작물이 땅속에 탄소를 안정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경종(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에서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평가하기는 어렵고, 따로 평가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게 농업의 ‘생산’ 부문에서 일부 온실가스가 배출된다고 해도, 여전히 국가 전체 배출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다. 그런데 ‘먹거리 시스템’ 전체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농축산업의 목적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이다. 먹거리는 생산-수송-가공-유통-폐기라는 거대한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생산은 먹거리가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과정의 첫 단계일 뿐이다. 생산된 농축산물은 트럭에 실려 다른 지역으로 수송되고, 식품 공장에서 가공되고, 시장이나 마트에서 유통돼 소비자들에게 닿는다. 소비자들이 다 먹지 못한 먹거리는 음식물 쓰레기로 폐기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탄소가 배출된다. 생산 단계에 해당하는 농축산업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전체의 2.9%지만, 먹거리 시스템 전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그보다 훨씬 많다. 특히 한국처럼 식량 자급률이 21%(곡물 기준, 2019년)밖에 안 되는 나라는 먹거리가 항공이나 배편을 통해 수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도 상당하다. 결국 농축산업 부문의 탄소중립은 ‘생산자’인 소수의 농축산업 종사자들만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먹거리 시스템’의 모든 부문에서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문제다.

농업‘생산’만 보는 뜬구름 정부 정책…‘먹거리 시스템’ 봐야 탄소중립 가능[탄소중립 제주,미리 가 본 미래 ⑥]

지엽적인 정책만 나열하는 정부

지난해 말 농림축산식품부가 내놓은 ‘2050 농식품 탄소중립 추진전략’에는 먹거리 시스템 전체에 대한 고민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정부 계획은 탄소 배출 비중 2.9%인 ‘생산’ 부문에만 철저하게 집중돼 있는데, 그마저도 구체적이지 않거나 농민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농식품부는 2050년까지 가축 분뇨 발생량의 10%를 바이오가스 등으로 에너지화하고, 새로운 처리 방식을 개발해 가축 분뇨를 235만5000t 감축하겠다고 했다. 현재 가축 분뇨 대부분은 퇴비화되어 농경지에 뿌려지는데, 이를 정화 처리하거나 바이오가스 등으로 에너지화하겠다는 것이다. 가축 분뇨의 연료화는 해외에서도 많이 시행하고 있는 필요한 정책이긴 하지만, ‘시설은 어디에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악취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분뇨 처리시설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갈등이 예상되지만 그런 부분을 어떻게 풀 것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대책이 없다.

전북 완주에서 한우를 키우는 박일진 완주한우협동조합 이사는 정부의 축산 대책에 ‘축산 규모 줄이기’ 같은 근본적 내용이 없다고 지적한다. “나도 축산은 분뇨만 문제인 줄 알았죠. 그런데 사료가 더 큰 문제더라고요.” 현재 가축 곡물사료는 거의 전량 해외에서 수입한다. 외국산의 값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더 많은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산림은 훼손되고, 곡물을 수입해 오는 과정에서도 탄소는 배출된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로 식량 생산이 불안정해지면 지금처럼 싼 해외 곡물 가격은 담보하기 어려워지고, 생산량 역시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저메탄, 축산 분뇨 처리를 말하기 전에 ‘사육 규모를 줄이는 것’으로 축산의 방향부터 정해야죠. 한데 정부는 그런 이야기는 안 하고 있어요.”

농민 전량배씨의 충남 서산의 논밭 전경. 농경지에서도 투입된 비료와 분뇨 등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권도현 기자

농민 전량배씨의 충남 서산의 논밭 전경. 농경지에서도 투입된 비료와 분뇨 등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권도현 기자

정부가 축산 다음으로 많은 탄소 감축 목표를 가진 분야는 농경지다. 정부는 농경지에 투입되는 분뇨량과 질소비료 등을 줄여 226만9000t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고 했다. 또 소의 장내 발효 과정에서 메탄이 덜 배출되도록 하는 저메탄 사료를 보급해 40만2000t, 벼 재배 때 1~2주간 논에서 물을 빼는 간단관개(중간물떼기) 기간을 늘리고 논물 얕게 대기를 통해 54만t의 탄소를 줄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저메탄 사료는 정부가 2025년을 목표로 개발 중이다. 아직 개발되지도 않은 사료가 나올 것을 가정한 계획이다. 간단관개와 논물 얕게 대기에 대해서도 농민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정부가 정말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농민들은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 정책위의장이 말했다. 그는 전남 화순에서 벼농사를 짓는다. “처음엔 잡초가 안 나게 물을 대지만, 나중에는 뿌리를 깊이 내려야 건강하니까 중간에 한번씩 물떼기를 합니다. 가을에 땅이 말라야 벼를 벨 수 있기도 하고요. 중간물떼기 기간은 토질에 따라 달라요. 물이 잘 빠지는 땅은 중간에 물떼기를 길지 않게 하기도 하는데, 저희 집은 완전히 진흙 논이에요. 중간에 10~20일씩 물을 떼고, 나중에는 거의 한 달 이상 하기도 해요.” 서산의 전량배씨는 “논물 얕게 대기는 이미 하고 있다. 논물 깊이 대봤자 볏대가 연해지기만 한다. 얕게 대는 게 훨씬 좋다. 처음에 물을 깊게 대는 이유는 잡초 방지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는 탄소중립을 위해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한다며 정밀 농업 기술 확대와 친환경 농업으로의 전환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정밀 농업이란 비료나 농약 등을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쓰는 농업 방식을 의미한다. 정부는 그 구체적 방안으로 첨단 농기계와 로봇 개발, 차세대 스마트팜 융합과 원천기술 개발 지원, 스마트팜 혁신 밸리 조성 등을 제시했다. 농민들은 ‘또 빚을 내서 시설 투자를 하라는 것이냐’고 우려하고 있다. 이근행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은 “스마트 농업은 유럽에서 ‘기후에 스마트한 농업(Climate Smarted Agriculture)’이라고 해서 변화하는 기후 상황에 농업이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온 개념이다. 이상기후 상황을 모니터링해 현장 상황과 연결시켜 생산 관리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개념이 갑자기 ‘스마트팜’이라고 하는 (공장식 농업) ‘시설’을 만드는 것으로 정착화돼 또 다른 설비, 시설을 들여놓는 정책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친환경 농업 전환과 관련한 정부 계획으로는 적정 비료 투입을 위한 토양 진단, 마을 단위 환경 관리를 위한 농업 환경 보전 프로그램 확대 등이 제시됐다. 하지만 지금 농촌에서 친환경 농업을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인력 부족’이다. 관행 농업에서 제초제 한 번 뿌리면 되는 일을 친환경 농업에서는 사람 손으로 다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많으니까 잠깐 지나가는 사람한테 ‘도와줘’ 하면 됐어요. 지금은 그럴 사람이 적어요. 저는 여기서 태어나서 대학 다닐 때만 나갔다 왔는데, 일할 사람이 줄었어요. 20년 전만 해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날아다녔거든요. 그 아주머니들이 그냥 늙은 거예요. 인구 유입은 없고.” 서산의 전량배씨가 말했다. 국내 친환경 농가 수는 2020년 기준 5만9249가구로, 2010년(18만3918가구)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멸해 가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

박일진 완주한우협동조합 이사의 축사에 있는 소들. 축사 규모는 60마리 이상의 소를 키울 수 있을 만큼 크지만, 사육두수를 줄이기 위해 30마리 이하의 소를 키우고 있다. 권도현 기자

박일진 완주한우협동조합 이사의 축사에 있는 소들. 축사 규모는 60마리 이상의 소를 키울 수 있을 만큼 크지만, 사육두수를 줄이기 위해 30마리 이하의 소를 키우고 있다. 권도현 기자

‘생산’을 넘어 ‘먹거리 시스템’을 봐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농축산업의 탄소중립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이 2.9%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먹거리 시스템 전반의 문제를 짚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해외에서 농축산업 부문의 탄소 감축은 시스템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탄소중립 청사진을 담은 ‘유럽 그린딜’의 7대 과제 중에는 ‘농장에서 식탁까지(Farm to Fork)’가 있다. 농장에서 먹거리가 생산돼 식탁에 오르는 전 과정에서 탄소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유럽 시민들에게 저렴한 식품을 공급하면서 지속 가능한 먹거리 시스템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처음부터 먹거리 시스템의 관점에서 농축산업의 탄소 배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송원규 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 부소장은 “해외는 농업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은 ‘푸드 시스템’적 접근이 대세다. 가공, 유통 영역을 포함해 전체 체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는데, 국내는 그런 흐름이 상당히 취약한 편”이라고 했다.

농축산업의 탄소 감축 문제를 먹거리 시스템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생산과 소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나의 식탁에 오른 먹거리들이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현재 국가 온실가스 통계를 내는 국제적 기준 자체가 그런 접근을 어렵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IPCC의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 가이드라인은 에너지, 산업 공정, 농업, 토지 이용, 폐기물의 5개 분야로 나뉜다. 한국은 이 가이드라인에 맞춰 농업 분야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장내 발효, 가축 분뇨, 벼 재배, 농경지, 작물잔사(작물의 부산물) 소각의 5개 항목으로만 산출한다. 모두 ‘생산’ 과정에만 해당하는 항목들이다. 이근행 소장은 “IPCC의 가이드라인 자체가 분업화된 산업화 체계를 토대로 만들어지다 보니, 일반 사람들도 생산과 소비를 잘 연결시키지 못한다. 체계 자체가 생산, 소비, 먹는 것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선임 통계학자 투비엘로는 지난해 쓴 보고서에서 IPCC 가이드라인에 따라 작성되는 국가 온실가스 인벤토리로는 먹거리 시스템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파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먹거리 시스템으로 분석할 경우 2018년 전 세계 먹거리 시스템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은 161억t으로, 전체 배출량의 33%를 차지한다고 했다.

영국 환경단체 WRAP는 영국의 먹거리 시스템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측정하는 연구도 진행했다. 이 연구에서는 농업 생산 과정뿐 아니라 동물 사료 생산을 위한 산림 벌채, 식음료 제조와 수송, 소비 단계에서 쓰이는 냉매와 비닐 포장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까지 분석됐다. 영국 내에서 배출된 온실가스는 아니지만, 영국의 식탁에 오르는 국외에서 생산된 식품과 열대 지역 상품 수입으로 인한 벌채까지 분석에 포함됐다. 이 결과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영국 먹거리 시스템에서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총 1억5800만t으로, 영국 전체 배출량의 35%에 달했다.

충남 홍성에 있는 정상진씨의 밭.  이준헌 기자

충남 홍성에 있는 정상진씨의 밭. 이준헌 기자

농축산업 기본 통계부터 마련해야

한국은 아직 국내 먹거리 시스템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구체적으로 연구한 사례가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연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먼저 농축산업 분야의 각종 통계들부터 제대로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는 “우리나라는 사육두수 파악이 잘 안 된다. 축산 통계의 가장 큰 문제는 농장에 살아 있는 가축이 아니라 도축된 것을 기준으로 역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가 없는데 어떻게 좋은 정책이 나오겠느냐”며 “생산 단계뿐 아니라 유통 단계에서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탄소가 나올 텐데, 그것을 계량화한 연구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근행 소장도 “먹거리 생산 부문에서 농가들이 얼마큼의 역할을 하고 또 품목별로는 상황이 어떤지 파악할 수 있는 통계를 찾기 어렵다”며 “산업 분야 등 다른 분야에 비하면 농업 분야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산정하기 위한 자료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분야별로 쪼개져 있는 먹거리 시스템에서의 온실가스 배출량 데이터들을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재 농축산물의 수송 과정에서 나오는 탄소는 에너지 중에서도 수송 부문, 식품 회사에서 가공될 때 나오는 탄소는 산업 공정 부문, 음식물 쓰레기에서 나오는 탄소는 폐기물 부문으로 흩어져 있어, 시스템적 접근을 어렵게 한다. 무엇보다 먹거리 시스템에서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측정하기 위한 연구는 정부가 공적으로 연구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진행되기 어렵다. 기업 입장에서는 식품의 가공, 유통 영역에서 온실가스 배출 문제가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송원규 부소장은 “정부도 굳이 그런 연구를 하지 않으려다 보니, 연구자들은 해외 사례를 인용해서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데이터와 통계가 먼저 제대로 정리돼야 먹거리 시스템의 탄소중립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농업과 농촌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도 필요하다. 그동안 농축산업의 탄소중립 정책은 에너지 전환 같은 다른 부문보다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지 않았다. 정부도 적극적이지 않았고, 농축산업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곳도 상대적으로 적은 데다, 이런 문제를 이슈화시킬 시민사회단체들의 동력도 떨어졌다. 도시에 몰려 있는 소비자들과 농촌, 농민 간의 연결성도 갈수록 흐릿해지고 있다. 이유진 부소장은 지금 우리 사회가 농촌을 대하는 태도가 “<6시 내 고향>과 배추값 사이의 어디쯤에 구경꾼으로 있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농촌을 자연 속 평온한 힐링 공간으로 소비하다가, 배추값 등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농축산물의 가격 문제만 따진다는 것이다. 이런 무관심 속에 농촌 소멸이나 식량 안보같이 농민들이 걱정하는 문제들은 사회의 주요 의제가 되지 못했다. 이 문제들은 모두 기후위기 시대에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먹거리 시스템의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이근행 소장은 “소비자들이 먹거리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기후위기 대응, 탄소중립 문제와 맞물려 있다”고 말했다.

농업‘생산’만 보는 뜬구름 정부 정책…‘먹거리 시스템’ 봐야 탄소중립 가능[탄소중립 제주,미리 가 본 미래 ⑥]

Today`s HOT
불타는 해리포터 성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올림픽 성화 범선 타고 프랑스로 출발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이란 유명 래퍼 사형선고 반대 시위 아르메니아 국경 획정 반대 시위 틸라피아로 육수 만드는 브라질 주민들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