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기업-하청노조 단체교섭 길 열었다···법원 “교섭 안하면 노동3권 본질적 침해”

이혜리 기자    김희진 기자
서울행정법원이 12일 “CJ대한통운은 택배노조와 단체교섭을 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선고한 직후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법원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사진 크게보기

서울행정법원이 12일 “CJ대한통운은 택배노조와 단체교섭을 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선고한 직후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법원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택배사인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의 사용자로서 택배노조와 단체교섭할 의무가 있다는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재판장 정용석)의 1심 판결은 원청기업에 대한 하청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재판부는 근로계약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단체교섭권을 부정하면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을 하청노동자들이 누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청노조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엄정 대응만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에도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1심 판결의 핵심은 택배기사와 CJ대한통운 사이에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없더라도 CJ대한통운은 택배기사들과 단체교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CJ대한통운을 택배기사들의 ‘실질적 사용자’로 규정한 셈이다.

재판부는 먼저 노동조합법상의 사용자 개념에 근로자와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없는 사용자도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단체교섭 의무를 지는 사용자가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근로계약관계가 아니라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결정권’이라는 점을 분명히했다.

재판부는 이같은 해석의 이유로 ‘노동3권 보장’을 들었다. 한 기업의 기능이 여러 기업과 사업주로 분할되는 노무관계 추세에 따라 노동조건에 대한 지배·결정권이 다면화하는 현실을 짚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계약관계가 있는 사업주에게만 단체교섭 의무를 지우면 노동3권은 온전히 보호받지 못한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하청노조가 하청기업 사업주를 상대로 쟁의행위를 하더라도 하청기업 사업주는 노동조건을 개선할 권한이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재판부는 “(원청 기업에 단체교섭 의무를 부여하지 않으면) 하청근로자는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권리로서의 근로3권을 향유할 수 있을 뿐”이라며 “이는 원청 사업주의 복합적 노무관계 형성이라는 경영상 방침에 의해 헌법상 기본권인 근로3권의 효력이 일부 중단되는 것과 같은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밝혔다.

경영계는 원청기업이 사업 일부를 하청업체에 떼주는 것은 기업 자유의 영역이고, 원청기업이 하청노동자까지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계약관계의 밀접성의 정도, 존부에 따라 기본권 행사 자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러한 자격을 가지지 못하는 하청 근로자에게는 근로조건에 대한 기본권 행사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이라며 “그러한 부당한 결과의 원인과 책임은 원청 사업주에게 있다”고 못박았다.

재판부가 CJ대한통운을 택배기사들의 실질적 사용자로 규정한 또 하나의 근거는 택배기사들이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이다. CJ대한통운의 택배사업 중 택배기사들이 담당하는 집화·배송은 가장 본질적이고 필수적·상시적 업무라는 점을 고려했다. 재판부는 택배노조가 내민 교섭 의제 중 ‘서브터미널에서 택배기사의 배송상품 인수시간 단축’ ‘서브터미널의 작업환경 개선’ 등은 CJ대한통운이 단독으로, ‘주 5일제 및 휴일·휴가 실시’ ‘수수료 인상’ 등은 CJ대한통운과 대리점주가 함께 교섭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서울행정법원이 12일 “CJ대한통운은 택배노조와 단체교섭을 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선고한 직후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법원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서울행정법원이 12일 “CJ대한통운은 택배노조와 단체교섭을 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선고한 직후 택배노조 조합원들이 서울 서초구 법원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이번 판결은 노동계·경영계 모두가 주목했다. 비단 택배업무에 국한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청노조가 원청기업에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판례가 될 수 있어서다. 대우조선해양 사태 등 근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노사 분쟁 사례 대부분이 하청노조와 원청간의 갈등이다.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규모가 갈수록 늘어나고 이들이 노조를 결성하는 추세여서 원청에게 단체교섭 의무가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대법원은 2010년 현대중공업 사건에서 사용자 개념을 ‘노동조건 등에 관하여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로 규정해 하청노조와 원청의 단체교섭을 인정하는 듯한 판시를 한 적은 있다. 다만 이 사건은 단체교섭 의무가 아니라 사측의 노조 활동 지배·개입이 문제된 사안이라 해석이 분분했다. 하청노조와 원청의 단체교섭이 쟁점이었던 별도의 현대중공업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법원이 이 현대중공업 사건이나 이번 택배노조 사건에서 하청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확대하는 새로운 법리를 세울 가능성이 있다.

윤석열 정부는 하청노조와 특수고용노동자의 파업을 불법으로 단정하면서 엄정 대응만 강조할 뿐, 이들의 노동3권 보장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를 ‘노동 개혁’의 핵심으로 짚으면서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중구조를 조장하고 활용한 사측의 책임은 도외시한 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청노조의 단체교섭권을 넓게 보장한 이번 판결은 현 정부의 이런 정책기조에도 제동을 건 효과가 있어 보인다.

이번 판결로 노동조합법상 사용자 정의 개념을 확대하는 내용의 법 개정 운동 역시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개정안)이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노동조건에 관해 실질적 영향력이 있는 자까지 포함하도록 노동조합법의 사용자 정의 규정을 개정하거나, 원청의 단체교섭 의무를 명시하도록 법을 바꾸라고 고용노동부에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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