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3자 변제’ 공식화

피해자 동의 없는 제3자 개입부터 ‘법적 무리수’

김혜리·이혜리 기자

배상안, 법적 허점투성이

<b>26년 전부터 싸워왔는데…</b> 1998년 6월30일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인 여운택씨(왼쪽에서 두번째)와 신천수씨(세번째)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오사카 지사 앞에서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시위를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6년 전부터 싸워왔는데… 1998년 6월30일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인 여운택씨(왼쪽에서 두번째)와 신천수씨(세번째)가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오사카 지사 앞에서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시위를 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민법 ‘제3자 배상’ 관련 조항
당사자가 허용 않으면 불가

재단이 공탁하더라도 ‘무효’
채권 소멸시키기는 어려워

피해자 기본 권리 빠진 배상
국제 인권법·대법 판례 대치

정부가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해법으로 제시한 ‘3자 변제안’은 새로운 법적 다툼의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피해자 동의 없이 ‘제3자’인 한국 정부가 마음대로 배상하는 게 가능한지를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정부가 국제인권법적으로 점차 중요해지고 있는 ‘피해자 중심적 접근’을 외면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 대책은 2018년 대법원이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재단이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포스코 등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수혜를 입은 국내 기업의 기부를 받아 재원을 조달하겠다고 했다. 피해자 측 승소가 확정된 뒤 강제집행 절차를 밟고 있는 3건의 피해자 14명이 대상이다.

핵심 쟁점은 피해자 동의 없이 제3자인 국내 재단이 일본 기업의 채무를 대신 변제해줄 수 있느냐다. 민법 제469조1항은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데,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의 의사표시로 이를 허용하지 않는 때는 그러하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근로정신대 소송을 대리한 김정희 변호사는 “해당 조항은 피해자가 제3자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수 없다고 밝히면 제3자가 일방적으로 변제하지 못한다고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했다.

피해자들이 거부해도 재단이 일방적으로 배상금을 법원에 공탁해 채무관계를 소멸시키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공탁의 유효성을 두고 또다시 법적 다툼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손해배상 소송의 피고는 일본 기업이지만, 이들이 재단 출연에 참여하지 않는 게 문제로 지적된다. 이렇게 되면 채무의 본질이 달라진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사건 채무의 성질은 통상의 손해배상 채무와 다르기 때문에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며 “공탁을 한들 무효인 공탁이기 때문에 채권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장 원고 대리인단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추가 집행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 대책은 법원이 심리 중인 66건(원고 1139명)의 재판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정부 대책에서 ‘피해자 권리’가 빠진 것도 법적 문제가 될 수 있다. 국제인권 규범들은 ‘피해자 권리’ ‘피해자 중심적 접근’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사람은 헌법·법률이 부여한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권한 있는 국내법정에서 실효성 있는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유엔은 1985년 ‘범죄와 권력남용의 피해자를 위한 정의에 대한 기본원칙 선언’, 2005년 ‘피해자 권리 기본원칙’을 채택해 피해자 권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이 규범들이 규정하는 피해자 권리에는 금전적 배상뿐 아니라 가해자의 사실과 책임 인정, 사과, 재발방지 보장 등이 포함된다.

2019년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피해자들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이 같은 피해자 권리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번 정부 대책은 공권력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헌법소원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가 주도한 재단에 국내 기업들이 출연하는 게 ‘자발적 기부’가 맞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정당한 명분 없이 출연을 하고 구상권도 행사하지 않는다면 형법상 배임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김제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부가 역사적인 사건에서 고뇌에 찬 결단을 했는데 행정부가 한순간에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은 삼권분립 측면에서도 문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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