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소의 눈물·단말마…” 살처분 트라우마 심각

경태영·최슬기·박효순 기자

참여 공무원 72%가 환청 등 후유증 호소

주민들도 ‘망연자실’… 경기 등 진료 나서

농민들이나 공무원들이나 다 같은 심정이었다. 구제역 탓에 자식처럼 키운 가축들을 단말마의 비명 속에 보내야 하는 농민들은 물론 살처분을 감당해야 하는 공무원들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식처럼 키웠는데 끌려가면서 살려달라는 듯 ‘꽥꽥’ 울어대는 돼지들을 보는 심정은 누구도 몰러. 나도 펑펑 울었지.”(축산농가 박모씨·충남 천안 병천면)

“주사 맞는 소들이 크고 선한 눈으로 껌벅껌벅 쳐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릴 때는…. 그놈들도 죽는 거 다 알어유. 그럴 땐 ‘이거 내가 뭐하는 기여’ 하고 자괴감이 들어유.”(김동광 충남 천안시 축산행정팀장)

이들은 당시의 기억, 공포감, 절망감 등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꿈에 소의 눈물·단말마…” 살처분 트라우마 심각

◇ “환청에 시달려…. 삼겹살도 못 먹어” = 9일 오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관성리. ‘음메~’ 소리와 ‘쾌에엑, 쾌에엑~’ 하는 소·돼지들의 비명소리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하늘을 울렸다. 하루 종일 살처분 작업을 지휘하던 천안시 김동광 축산행정팀장은 “요즘 들어 하룻밤 사이 5번은 잠에서 깬다”면서 “정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고충을 호소했다.

강원도에서 살처분을 담당해온 강원도 가축위생시험소 남부지소 홍경수 지소장은 “살처분에 참여했던 수의사와 직원들이 밤마다 소·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등 환청에 시달려 술을 마시지 않고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호소하는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키우던 한우 25마리를 창졸간에 매몰시킨 경북 예천군 호명면 오천리 장용덕 이장(56)은 “나뿐 아니라 주민들 모두 살아갈 의욕을 잃었다”면서 “주민들 간 말도 없어지고 마을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전했다.

안동시 공무원 박모씨(31)는 “소와 돼지를 구덩이에 넣을 때 가축들의 눈을 애써 피하며 눈물을 흘리는 노인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전한다. 그는 “살처분 작업 후에는 순댓국과 선짓국은 물론이고 즐겨 먹던 삼겹살도 꺼린다”고 토로했다.

◇ 72%가 시달려 = 국회 김영우 의원(한나라당)이 살처분에 참여 중인 경기 포천·연천지역 공무원 2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71.7%가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질병에 걸린 응답자도 30명(14.2%)에 달했다.

경기도는 10일부터 가축농가와 담당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벌여 증상이 심할 경우 경기도의료원 및 도내 의료기관들과 연계, 정신과 진료를 펼칠 예정이다. 강원도 광역정신보건센터도 축산농민과 공무원들을 지원하기 위해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키로 했다.

한편 서울대병원은 10일부터 홈페이지(www.snuh.org)에서 구제역과 관련된 농민, 방역요원, 수의의료진 등을 대상으로 상담코너를 운영한다. 서울대병원 권준수 교수(정신과)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이 오래 방치될 경우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일명 트라우마(Trauma)라 한다. 전쟁과 고문, 자연재해와 끔찍한 사고 등을 경험한 뒤 공포감을 느끼며 환청·불면 등의 정신적인 장애가 한 달 이상 계속되는 질병을 말한다.


<경태영·최슬기·박효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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