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세상 속으로’

유족에게 필요한 건 ‘조용한 관심’… 섣부른 동정·위로보다 묵묵히 경청하고 현실적 도움 줘야

박주연 기자

김태경 교수, 유족 11명 심층 면담

살인피해 유족이 사건 후 겪는 트라우마는 깊고도 어둡다. 이는 지난해 김태경 백석대 교수가 법무부 연구용역을 의뢰받아 서로 다른 유형의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11명을 심층 면담한 결과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사건 직후 모든 참여자가 정신의학적 진단이 내려질 정도의 심각한 후유증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7명(63%)이었으며, PTSD 진단과 우울장애를 중복진단받은 사람이 3명(27%), 주요우울장애가 1명(9%)이었다. 증상의 심각도 면에선 최중증 수준의 후유증을 경험한 사람이 3명(27%)이나 됐고, 나머지 8명(73%)은 중증도 수준의 후유증을 겪었다. 대체로 사건 후 1년이 가장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3년째에 접어들어서도 상당한 고통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유증의 종류와 심각도 및 경과는 사건장면에의 노출 여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수사 및 재판과정에의 관여도, 경과된 시간, 주변 반응, 형사사법기관 종사자의 태도, 언론에 의한 2차 피해, 피해자와 유가족의 관계 등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사건 현장을 직접 보거나 범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의 시신을 보는 것은 유가족에게 상당한 충격과 후유증을 안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 반복적으로 상상했다.

이들은 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반복되는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그리고 남은 가족의 안전에 대한 불안이 야기하는 공포를 공통적으로 토로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사라진 일상, 자기연민, 망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공통된 현상이었다. 가족 구성원 간에 상실에 따른 심리적 고통을 공감하기는 하지만 서로 공유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었다. 사건 후 가족이 서로 든든한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경우가 11명 중 9명(82%)이었다.

살인피해 유족들은 주변 사람들의 부적절한 관심과 동정에도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임에도 “이해한다”고 말하거나 “그만 털고 일어나라”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등의 관심과 섣부른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다. 김태경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살인사건 피해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한 관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묵묵히 이들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견디어 주는 것, 필요할 때 현실적인 도움(집안 청소를 해준다거나 아이를 돌봐주는 등)을 제공해주는 것, 슬픔에 대해 말하라고 종용하기보다 이들이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 이들이 슬픔에 대해 말할 때 경청해주고 섣불리 질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유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찰 매뉴얼 개발과 교육도 절실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 후 유족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경찰의 말이나 행동 하나가 유족들을 더 큰 슬픔이나 분노로 몰아넣을 수도 있고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한 2차 피해는 사건 직후뿐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족들은 TV에서 살인사건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많이 보도되는 것 같다고 지각했으며 그러한 자극에 노출될 때 사건이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은 강한 감정적 동요를 경험한다고 진술했다. 또 어떤 유족은 자기 가족과 관련된 사건 자료를 언론에서 무분별하게 재방영함으로써 반복적으로 고통당한다고 하소연했다. 김 교수는 “언론 보도 시 살인사건 피해 유가족뿐 아니라 강력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2차 피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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