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보도 ‘세상 속으로’

살인피해 유족, 끝나지 않는 ‘트라우마 고통’

박주연 기자

“죽지 못해 사는 거지요.” 그는 낮고, 생기 없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저는 오늘 죽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아요. 아이들을 떠나보낸 2006년 그날 이후 저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결코 돌이켜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간을 이야기할 때는 여러 차례 말이 끊겼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질문을 던지는 게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2006년 1월18일 새벽에 발생한 한 사건은 송민호씨(55·가명)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그날 TV 9시 뉴스와 이튿날 배달된 조간신문에는 18일 새벽 5시50분 서울 수유동 2층 단독주택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났고 큰딸(21)과 작은딸(17), 아들(12) 등 삼남매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아버지 송씨는 부엌 쪽 창문을 통해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3도 화상을 입어 중태라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숨진 작은딸의 머리에는 방화 전 둔기로 맞은 것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었다. 당시 부인은 부부가 같이 운영하던 여관일을 보고 있어 사건 현장에 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아버지 송씨였다.

살인피해 유족인 송민호씨(가명)가 지난 10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서부지검 범죄피해자지원센터로 들어서고 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살인피해 유족인 송민호씨(가명)가 지난 10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 서부지검 범죄피해자지원센터로 들어서고 있다. |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경찰이 일주일에 몇 번씩 제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와서 저를 취조했어요. 그러자 아내까지 저를 경계하면서 의심하기 시작했죠. 생지옥 같았던 화상치료 과정보다 저를 더 힘들게 한 건 아이들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아내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불신이었습니다. 세상에 저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꺽꺽대며 울었어요.”

억울한 누명을 벗은 것은 그로부터 석 달 후였다. 그해 4월22일 다른 사건으로 검거된 정남규가 수유동 사건도 자신이 저지른 범행임을 자백했다. 정남규는 2004년 1월부터 2006년 검거될 때까지 2년 동안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살인범이었다. 정남규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2009년 2월21일 구치소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흉악범으로 인해 송씨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가족도, 재산도, 건강도, 외모도, 평범한 삶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는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다가 사건 발생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했다.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지독한 우울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아내와도 결국 갈라서야 했다.

사건 당시 전신 76%에 3도 화상을 입은 그는 허벅지 안쪽 피부를 떼어내 얼굴 등 손상이 심한 부위에 이식하는 수술을 수차례에 걸쳐 받았다.

“병원에서 붕대를 풀고 처음 거울을 본 날, 거기에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어요.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노란 진물이 피에 섞여 뚝뚝 떨어졌어요.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믿기 힘든 이 모든 일들이 차라리 악몽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건 후 7년이 흘렀지만 그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멀쩡하던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국가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정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오경식 강릉원주대 법학과 교수는 “살인범죄로 가족을 잃은 유족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가정경제가 파탄나는 경우가 많음에도 피해자가 사망하고 없다는 이유로 보호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피해유족을 치유하고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범죄피해자센터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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