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규제 완화’ 초점에 “주 120시간 일하나” 여전한 우려

이혜리 기자

‘선택 근로시간’ 정산기간 1년 등 노동시간 유연화 추진

임금체계 개편도 공약…비정규직 해소책은 제시 안 해

7월쯤 결정 ‘내년도 최저임금’ 윤석열 정부 첫 시험대

노동계는 “과로사 위험 등 노동자 건강권 침해” 지적

“특고·플랫폼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23일 서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와 플랫폼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특고·플랫폼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23일 서울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특수고용노동자와 플랫폼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정말 주 120시간 일해야 되나요?” “최저임금 폐지되나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 1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걱정이 담긴 질문들로 뒤덮였다. 선거 과정에서 윤 당선인이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쉬어라’, ‘최저임금보다 적더라도 일하겠다는 근로자가 있다’와 같은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윤 당선인은 나중에 자신이 주 52시간제와 최저임금 폐지를 주장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

윤 당선인 노동 공약의 핵심은 ‘사용자에 대한 규제 완화’다.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 법령은 기본적으로 노동자가 사용자에 비해 취약한 지위에 있다고 보고, 노동자를 보호하며 사용자를 규제하는 틀에서 짜여 있다. 하지만 윤 당선인은 그러한 기존의 노동관계 법령이 지나치게 사용자를 옭아맨다는 철학을 드러내왔다. 사용자 규제를 풀어야 일자리 창출을 통한 청년 실업 해결이 가능하고, 또 그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다양한 수요를 활용할 수 있다는 취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전환을 직면한 시기에 더욱 노동자를 두껍게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노동계는 윤 당선인의 태도가 ‘반노동적’이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향후 윤석열 정부 5년 동안 노동정책을 둘러싼 노사정 간 분위기는 격랑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노동계 “과로사 조장” 우려

윤 당선인 노동 공약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노동시간 유연화’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을 기본으로 하고 12시간을 초과 근무할 수 있도록 해 총 52시간을 노동시간 한도로 정한다. 다만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같이 그 원칙을 깰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다. 근로자대표와 사측 합의에 따라 1~3개월을 단위(정산기간)로 해 52시간 이상을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은 연간 노동시간이 2019년 기준 1967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긴 장시간 노동국가라, 노동계는 이 같은 노동시간 한도의 예외를 두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해왔다.

윤 당선인의 노동시간 유연화 공약은 지금의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더욱 폭넓게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일단 정산기간을 1년으로 늘렸다. 평균 노동시간만 법정 기준에 맞추면 되기 때문에 정산기간이 늘어나면 더 긴 시간의 노동을 압축적으로 하는 게 가능해진다. 또 기존의 근로자대표와 사측 합의는 사업장 전체를 대상으로 했지만 이를 직무나 부서별로 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사업장이라도 어떤 직무나 부서는 노동시간 유연화가 필요한 만큼 각기 다른 상황과 수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풀타임(전일제)으로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에게 파트타임(시간제)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시간 선택형 정규직’도 있다. 이를테면 풀타임 노동자가 육아를 해야 할 때 파트타임 전환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 밖에 연장근로시간 특례업종이나 특별연장근로 대상에 신규 설립된 스타트업을 포함시키겠다는 내용도 있다. 공약집엔 이 같은 공약이 노동자의 ‘시간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돼 있다.

노동계에서는 윤 당선인 공약이 장시간 노동을 조장해 과로사 위험 등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을 1년으로 늘렸을 때 일별 또는 주별 최대 노동시간 한도를 별도로 정하지 않는다면 최소한의 휴식시간도 보장되지 못하고 짧은 시간에 무제한적인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3개월간 주 60시간을 일했다면 과로에 의한 사망으로 인정된다. 근로기준법은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하더라도 근무일과 다음 근무일 사이에 11시간 이상의 휴식시간을 주도록 하고, 1주의 근로시간이 40시간을 초과한 부분에 대해서는 통상임금의 1.5배를 지급하도록 돼 있지만 이 같은 규정들이 형해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사업장의 근로자대표가 아니라 직무나 부서별로 사측과 합의해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노동조합 배제와 영역 쪼개기에 따른 노동자 불이익을 우려하는 시선이 있다. 시간 선택형 일자리는 박근혜 정부가 도입한 뒤 많은 비판을 받았다. 고용률은 높아질지 모르겠지만 결국 단시간만 일하는 질 낮은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윤 당선인 공약은 시간제 비정규직을 신규 채용하는 게 아니라 이미 채용된 정규직이 시간제를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지만, 결국 복지·승진·평가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는 등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은 어렵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규직이 시간제를 선택하는 대신 그 자리를 메꿀 또 다른 시간제 비정규직이 필요한 문제도 있다.

유정엽 한국노총 정책2본부장은 “노동자 선택에 의해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일거리를 주는 사용자 요구에 의해 근로시간이 짜이고 통제되며 노동자는 사용자 계획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며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는) 과로사가 심각하게 발생할 수 있고, 시간 주권의 차원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 주 52시간제를 시행하면서도 탄력적·선택적 근로시간제와 같은 유연화 제도를 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제도의 부정적 효과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다.

■최저임금 차등 적용, 쉽지 않을 듯

내년도 최저임금은 당장 이달 말 고용노동부 장관의 요청으로 최저임금위원회가 심의에 돌입하게 된다. 통상 7월쯤 결정돼 윤석열 정부의 첫 노동정책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소상공인의 어려움과 최근 급등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인상률을 놓고 노사 어느 한쪽 입장으로 끌고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대신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차등 적용’이다. 윤 당선인 공약집엔 최저임금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윤 당선인이 선거 과정에서 “업종별·지역별 차등 적용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가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말한 다음부터다.

현재는 전국에 적용되는 하나의 최저임금을 최저임금위에서 정하지만, 업종·지역별로 각각 다른 최저임금을 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구체적인 내용이다. 최저임금법은 “최저임금을 사업의 종류별로 구분해 정할 수 있다”고 규정해 업종별 차등 적용은 현행법상 가능하기는 하다. 매년 최저임금위에서 경영계가 도입을 주장하고 노동계는 반대하며 논쟁만 해왔는데, 윤 당선인이 도입 필요성을 언급해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노동계는 최저임금법의 업종별 차등 적용 조항을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임금의 최저 수준을 보장해 노동자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게 최저임금 제도의 목적인데, 특정 업종에서 최저임금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정한다면 제도 취지에 어긋난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적용이 쉽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오상봉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어떤 업종에서 얼마나 높고 낮은 임금을 적용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사용자들끼리 싸움이 붙을 수 있고 통계 활용도 여의치 않다는 점에서 업종별 차등이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며 “현재 사용자들의 요구는 차등적으로 낮게 적용해달라는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의 생활 안정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했다.

지역별 차등 적용은 법에 없는 제도라 도입하려면 법을 개정해야 한다. 이 방식도 서울은 최저임금이 높고 제주는 낮은 식으로 진행될 경우 지역차별 논란이 불거질 수 있고,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이 높은 지역으로 옮겨가게 되는 등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최저임금 결정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최저임금위 공익위원을 정부가 위촉해 정부 입김이 반영된다는 지적이 있었던 만큼 ‘공정과 상식’을 설파해온 윤 당선인이 향후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관건이다.

■노동법 사각지대는 어쩌나

윤 당선인 노동 공약 중 눈에 띄는 것은 ‘일하는 모든 사람의 보호를 위한 기본법’이다. 공약집에는 이 법과 관련해 “다양한 고용형태를 포괄한 모든 노동자의 기본적 권리 보장 법제화”라고만 돼 있다.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 바깥에 있는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프리랜서 등을 보호하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도 ‘일하는 사람 권리보장 기본법’, 정의당은 ‘일하는 시민을 위한 기본법’과 같이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법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윤 당선인의 기본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규정하고, 공정한 계약 원칙 등을 명시하는 내용으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취지의 법은 2000년대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돼왔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과 같은 이름으로 국회에 매번 법안으로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별도 법을 만들지 말고 기존 노동관계 법령을 적용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반대 입장을 펴왔다. 민주노총은 지난 21일 윤 당선인에 대한 요구안에서 노동조합법 2조를 개정해 근로자 정의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말 그대로 기본법이기 때문에 선언적 의미에 그칠 수 있고, 플랫폼노동자 등이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 영역에서 오히려 배제되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당장 근로기준법 적용이 힘든 상황에서 기본법을 통해 최소한의 보호라도 받을 수 있게 제도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 밖에 윤 당선인은 임금체계 개편도 공약했다. 연공급 중심의 임금체계를 직무가치와 성과를 반영한 임금체계로 개선해 청년 고용 활성화와 장년층 고용 안정을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노사관계와 관련해서는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을 근로자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방안을 내놓았는데, 노동조합 역할을 약화시킨다는 차원에서 노동계는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대표적노동정책으로 추진한 것과 달리 윤 당선인 공약집에는 비정규직 해소에 대해 별다른 대책이 나와 있지 않다.

윤 당선인의 노동 공약 중엔 정부 의지에 따라 당장 시행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법 제·개정 등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사안들이다. 민주당이 국회 다수를 점하고 있는 데다 노동계가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윤 당선인의 노동 공약 추진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리 보는 국정 ⑨ - 노동정책 어떻게]‘사용자 규제 완화’ 초점에 “주 120시간 일하나” 여전한 우려

윤석열 당선인 ‘노동 공약’ 설계한 유길상 명예교수


플랫폼·특수고용 노동자
시각 따라 ‘사업자·근로자’
‘일하는 사람 보호법’ 취지는
교섭권 등 보장해주자는 것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노동 공약 틀은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의 지속가능한복지국가정책본부 고용노동정책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유길상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69·사진)가 짰다. 지난 14일 유 교수를 만나 윤 당선인 노동 공약에 담긴 철학이 무엇인지 물었다.

유 교수는 “시장 원리에 의한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보호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장 원리에 따라 일자리 창출과 자원 배분이 이뤄지지만 시장에만 맡기면 노동자 보호를 도외시하게 되고, 사회적 보호만 강조하면 기업이 해외로 나가 국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노동법 규범을 유연화해 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전환에 기업이 잘 적응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활발히 하도록 해야 한다”며 “그 대신 고용서비스와 복지 부분에서는 과감하게 (노동자) 보호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그 방법과 관련해 유 교수는 ‘물고기를 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비유를 댔다. 기본소득처럼 현금성 지원은 청년 실업과 양극화를 더 심화시킨다고 봤다. 노동시간 유연화 공약 중 선택적 근로시간제의 정산기간 확대 때문에 노동자의 건강권 침해 우려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휴식시간을 전제로 한도를 정해야 하고, 세부적인 것은 노사 간 합의를 통해 해야 한다”며 “한도 없이 무제한적으로 일하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윤 당선인 공약집엔 ‘자유’ ‘선택’과 같은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노동 공약엔 ‘MZ세대’로 불리는 청년들이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유 교수는 “컨베이어 벨트에 다 같이 앉아서 같은 일을 하는 산업화 시대의 규칙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용될 수는 없다”고 했다. ‘일하는 모든 사람의 보호를 위한 기본법’ 공약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고 했다. 노동계는 플랫폼노동자와 특수고용노동자를 노동관계 법령상의 노동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 교수는 “사업자인지 근로자인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데 ‘전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All or nothing)’는 식의 접근은 사업주에게도, 근로자에게도 안 좋다”며 “가장 어려운 사람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적어도 기본법으로 대표성을 갖고 교섭할 수 있는 권리, 근로시간, 갑질 예방, 모성 보호 등은 보장해주자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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