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허남설·고희진·정대연 기자

정치인·고위공직자·기업인이 속여온 말의 속뜻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순수하지 않은 정체성을 가진 일부 세력이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근거 없는 소문이 소모적인 갈등을 낳고 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합니다. 국가 안위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국민은 이기주의자일 뿐입니다.”

과거 통치자들로부터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이 문장은 인용문이 아니라 경향신문이 가상으로 구성해본 문장이다. 순수, 정체성, 위기, 소문, 갈등, 책임, 이기주의 같은 단어는 시민들을 가두는 프레임으로 권력이 사용해온 대표적인 말이다.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산다’는 메시지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일부의 이기주의가 불필요한 갈등을 낳고 있다”는 세련된 외관을 갖춘 말로 유포된다. 경향신문은 1987~2016년 경향신문 1면과 연관 기사에 보도된 정치인·고위공직자·기업인의 말을 조사했다. 이 중 일상적으로 쓰이는 낱말을 골라 그 이면에 담긴 뜻을 분석했다. 낱말 하나하나에도 권력의 의도가 녹아있기 마련이다. 권력의 프리즘을 거친 낱말은 사전적 의미 ‘이상(?)’을 담고 있다. 권력의 언어를 의심하는 데서부터 민주주의는 작동한다.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위기(危機)】권력이 어려울 때 방패막이로 삼는 말이다. 위기 수습 책임을 진 당사자이면서 이를 불리한 여론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금융·부동산·안보·질병 등 다방면에 연결 지을 수 있는 ‘만능열쇠’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2010년 1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명분으로 특별사면 받은 뒤)

“소고기 문제와 남북문제로 경제문제가 잘 안 보여서 그렇지 지금 경제가 국난(위기)적 상황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2008년 7월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

누군가 위기를 언급할 때면 영화 <베테랑>의 재벌 조태오(유아인)의 대사를 떠올리면 된다. “난 어릴 때부터 매년 올해 감기가 제일 지독하고, 올해 경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을 한 해도 안 빼먹고 들었어요. 그래서 죽었나요? 안 죽었잖아.”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순수(純粹)】한국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다. 반대말은 ‘불순’이다. 순수한 대학생, 순수한 집회참가자, 순수한 노동자, 순수한 유가족까지.

“순수한 추도행사가 아니고 민중봉기를 통한 정권탈취 기회로 삼으려는 불순한 집회.”(1987년 2월 민정당 논평, 고 박종철 열사 추도식에 대해)

“지금 (청와대 앞에) 유가족분들이 와 계시는데, 순수 유가족분들 요청을 듣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나가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입장이 정리됐다.”(2014년 5월 민경욱 전 청와대 대변인, 세월호 유가족의 면담 요구에)

전방위적으로 순수·불순을 가리려는 권력의 잣대 앞에서 시민들에겐 의연한 대처가 요구된다.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 ‘비선 실세’ 최순실씨 국정농단 의혹에 대해)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갈등(葛藤)】정치·경제 권력들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란 뜻’으로 애용한다. 정치분쟁, 노사분규 등 ‘갈등=낭비’라는 딱지를 붙인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는 사회적 갈등에 수백조원의 비용이 소요됐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는 화합보다는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1988년 5월 노태우 전 대통령)

“노동법 재론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국론분열과 노사 간 의견대립에 따른 갈등 심화에 대해 우려한다.”(1997년 1월 경영자총협회 논평, 국회 ‘노동법 날치기’ 재협의 방침에)

민주주의에서도 갈등 없이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건 통치자들의 바람인 듯하다. 그 결과 정치적 반대나 논쟁을 곧잘 ‘갈등’으로 치환해 터부시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어물쩍 넘어가려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남이다.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소문(所聞)】권력은 대개 소문을 용납하지 못한다.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엔 관심이 없다. 해명은 고사하고, 소문의 진위가 궁금해 광장에 모인 시민들 주위로 ‘경찰 차벽’을 쌓는다. 하지만 권력이 입을 다물수록 소문은 힘을 얻는다. 소문의 다른 말엔 ‘찌라시(지라시)’가 있다.

“근거 없는 소문과 미신, 조작된 정보가 휩쓰는 비과학적 세상을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라고 했다.”(2008년 5월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에 대해)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2014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정윤회 비선 실세 문건’ 의혹에 대해)

권력이 계속 소문에 입을 닫으면 광장에 ‘1000만 시민’이 모이는 날이 온다. 근거 없는 소문은 악령을 부르지만, 근거 있는 소문은 주권자를 부른다. 요즘 한국에서 목도하는 진리다.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정체성(正體性)】사람 혹은 사물이 지닌 고유한 특성. 제 멋대로 자신의 잣대로 누군가를 재단하고 끼워 맞추려 할 때 사용되는 단골메뉴다.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2008년 6월 이명박 전 대통령,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대해)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학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다.”(2015년 11월 황교안 국무총리,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에 대해)

정체성을 들먹이는 것은 민주화 이전 어느 시점에서 ‘정체(停滯)’된 한국 사회 일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이런 말을 들었다고 정체성 혼란을 느낄 이유는 없다. 진짜 정체성 고민이 필요한 사람은 이 나라의 실세가 대통령이었는지, 비선이었는지 헷갈리게 만든 그분이다.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이기주의(利己主義)】자신의 권리를 말하면 이기주의란 딱지가 붙는다. 같은 목표를 가진 이들이 모이면 집단이기주의가 된다.

“근로자들도 지나친 이기주의적 행동으로 나갈 때 회사는 물론 나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1993년 6월 김영삼 전 대통령)

“새해엔 집단이기주의 행태가 자제되고, 상생과 공존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2013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철도노조 파업에 대해)

집단이기주의를 해소하려면 그 집단을 보다 더 큰 집단과 ‘갈등’시키면 된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10만 시위대는 1000만 서울시민과 대비하면 된다. 이런 셈법으로는 대한민국에 5000만명의 이기주의자들이 있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민주주의는 목소리다]②“엄청난 위기” 알고 보면 그들만의 위기

【책임(責任)】시민을 상대로는 엄중하지만, 자신에겐 깃털처럼 가볍기 일쑤다. 혼자 독박 쓰는 일은 드물며 이런저런 핑계로 나눠지거나 덮어씌우는 일이 흔하다. 반면 필요할 때는 자신의 책임을 과장해 권위를 세우려고도 한다.

“문민정부는 민주화를 위한 역사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떠한 불법에도 타협하지 않고 엄정히 법을 다스려 나가겠다.”(1994년 6월 이영덕 전 국무총리, 철도파업에 대해)

“이번 개각에서 유임된 것은 책임감을 갖고 사고를 끝까지 잘 수습하라는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 국민의 엄중한 명령.”(2014년 6월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 세월호 참사 후 유임이 결정되자)

참고로 “책임질 게 있다면 책임지겠다”란 말 앞에 “법적으로”란 단서를 붙이는 이들은 대개 ‘법률 미꾸라지’로 이해하면 된다.

■특별취재팀
송윤경 김지원 정대연 허남설 고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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