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가족은? ‘느슨한 점선 같은 가족’

박은하 기자

가족과 돌봄을 ‘다시 쓰기’

“당신이 만들고 싶은 가족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가족은 더 이상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이며 독신과 입양도 소망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로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응답자들은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족이 아니라 ‘내’가 있는 가족이어야 사랑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사진 크게보기

“당신이 만들고 싶은 가족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가족은 더 이상 하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결혼도 출산도 선택이며 독신과 입양도 소망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수로 여기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응답자들은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가족이 아니라 ‘내’가 있는 가족이어야 사랑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한국서 가족은 애정의 결합이 아닌
국가에 동원된 정치경제적 유닛
결혼·출산에 대한 거부감 불러

한국인에게 가족은 한때 따뜻한 이미지를 주는 대명사였다. 명절이면 ‘민족대이동’이 일어난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는 우리가 고향에 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또 하나의 가족’처럼 기업 이미지 광고에도 가족이 등장했다. 가족은 서로 보듬고 돌보는 공간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대이동 끝에 모인 친척들이 각자의 재산과 자녀의 학업성취나 결혼상대방을 비교하다 “상 차리라”며 며느리를 부른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거나 싱글맘 등 정상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족의 공동체 내에 편입되지 못하고 숨는다.

“딸 같아서” “아들 같아서”는 직원에 대한 성범죄나 착취를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변명이 됐다. ‘또 하나의 가족’들은 위기 때마다 가족이라 부르던 이들을 잘라 살아남았다. 돌봄은 사교육 압박과 막대한 가사노동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가족은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희생을 요구할 때 빌려오는 표현이 됐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처음으로 1명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더 이상 가족을 구성하지 않겠다는 환멸이야말로 초저출산 현상의 근본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가족을 구성하는 이유였던 ‘돌봄’이 여성에게만 집중되면서 ‘대가 없는 희생’이 돼 버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출산율이 아니라 가족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 한국인에게 가족은?

상류층 가정의 사교육 경쟁을 그려낸 JTBC 드라마 <SKY캐슬>은 현대 한국인들의 가족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드라마에서 가족은 자녀교육을 위한 베이스캠프(기지)처럼 운영된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교육비용을 대는 투자자, 어머니는 자녀들을 관리하는 경영자이다. 사교육의 목적은 아버지가 가진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캐슬’ 가족들은 자녀를 위해 반칙도 불사하지만, 결국 ‘살인’과 ‘자살’이라는 파국이 가족 때문에 벌어진다.

이영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과거 드라마에서 가족은 지켜져야 할 따뜻한 곳,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 방영된 <사랑이 뭐길래>의 경우 갈등의 원인은 가부장적 아버지, 억눌린 어머니, 철없는 아들, 신세대 며느리 등 가족 개개인의 캐릭터에서 비롯된다. 가부장제에 반기를 드는 며느리가 등장하는 등 사회상을 반영하지만 가족 바깥의 사회는 극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SKY캐슬>에서 교육과 불평등이란 사회문제는 적극적으로 가족으로 침투하고 영향을 준다. 이 교수는 “<SKY캐슬>에서 가족은 그 자체로 갈등의 원인이자 ‘죽음’이라는 형태로, 사회문제로 인한 피해가 돌아가는 최종적인 곳으로 묘사된다”며 “사람들이 더 이상 가족에게서 위로를 찾지 못할뿐더러,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한국인의 가족관을 변화시킨 계기다. 외환위기 이후 이혼율이 치솟고 자녀를 먼저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형태의 가족범죄가 급증했다. 반면 살아남은 가족들은 사교육과 부동산 투자에 더 힘을 쏟는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 2세와의 결혼을 통해 사랑과 신분상승을 동시에 얻는다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부쩍 증가했다. 가족은 권력과 부를 승계하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사랑의 결합체라는 환상으로 포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교수는 “신데렐라 드라마마저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고 말했다. 포장지로 덮어도 대중의 마음을 속일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 한국은 개인 아닌 가족으로 이뤄진 사회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가 개인이 아닌 가족”이라며 한국을 ‘가족 자유주의 체제’로 규정했다. 장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족은 애정의 결합체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의해 동원되고 역할을 수행하는 정치경제적 유닛(단위)”이다.

서구에서 국가와 시민 간 계약으로 사회가 탄생했다면 한국 사회는 국가의 가족 동원으로 탄생했다. 이 가족은 저임금에도 장시간 노동을 하는 아버지, 이 아버지와 미래의 노동자인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어머니로 구성된다. 교육·주거·의료 역시 가족이, 가족 내에서 어머니가 수행해야 할 의무가 된다. 국가의 역할은 개발을 통해 아버지에게 일을 나눠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복지지출에 비용을 들이지 않고 손쉽게 개발에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다. 기업은 노동자의 돌봄에 신경 쓰지 않고 장시간 노동을 시킬 수 있게 된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각각의 헌신을 통해 경제성장의 과실을 따서 자녀에게 전달한다.

문제는 아버지의 일자리가 불안정했다는 점이다. 장 교수는 “한국의 산업화는 장수가 말을 갈아타듯 진행됐다”고 했다. 농업에서 도시경공업, 도시경공업에서 중공업, 중공업에서 IT와 첨단산업으로의 격변이 30~40년 만에 일어났다. 한 개인이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속도이다. 1932~1961년 출생한 남성들은 결혼할 무렵의 직업을 만 45세가 될 때까지 유지하는 비율이 40%에 불과했고, 나머지 60%는 자영업 등 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밀려나는 직업의 이동을 겪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성이 불안정한 직업으로 이동하는 동안 안전망은 없었다.

가족의 불안은 기혼여성의 ‘맞벌이’로 문제를 해결했다. 대부분 남편보다 더 불안정한 일자리였다. 2017년 기준 직장인 평균소득은 남성이 337만원, 여성이 213만원이었다. 20대 남성(206만원)과 여성(190만원)은 엇비슷했지만 40대 남성은 416만원, 여성은 251만원으로 격차가 크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아져도 남녀의 가사노동시간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에서 여성의 가사노동시간은 남성보다 3배 높다. 가사노동은 ‘아내·어머니’의 역할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확고한 탓이다. 기업은 이 과정에서 비용을 아끼고 국가는 방관한다.

돌봄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회에서
여성에게 돌봄의 의무가 집중되고
남성 가장은 돌봄에 극히 무능해져

‘가족의 동원’은 돌봄의 불균형으로, 돌봄의 불균형은 결혼과 출산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장 교수는 “미혼여성에게는 갈수록 결혼이 불안정 고용 상태에서 가사 참여도 저조한 남편과 다양한 돌봄 의무와 본인의 고강도 직장생활 사이의 황당한 결합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말했다.

개인을 대신하는 가족은 개인에게 억압으로 다가온다. 장세현씨(33·가명)는 가족을 떠나기 위해 비혼과 유학을 택했다. 장씨는 “어릴 적부터 ‘너 그거 하면 안돼’ ‘네가 그런 것 할 때야?’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공간이 가족이었다”며 “사랑하는 사이에서라면 오히려 할 수 없는 말들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출산과 결혼거부 등의 가족해체는) 개인존중의 개념이 없고, 공사 구분 불명확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 가족이라는 말로 개인이 사라지는 것이 싫은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속 ‘가족’의 변화

<사랑이 뭐길래>

[다시 쓰는 인구론]우리가 원하는 가족은? ‘느슨한 점선 같은 가족’

가족은 상처를 치유하는 곳. 갈등의 원인은 사회가 아닌 캐릭터에 한정된다.

<SKY캐슬>

[다시 쓰는 인구론]우리가 원하는 가족은? ‘느슨한 점선 같은 가족’

교육과 불평등이라는 사회 문제의 해결 없인 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마더>

[다시 쓰는 인구론]우리가 원하는 가족은? ‘느슨한 점선 같은 가족’

혈연이 아닌 방식으로 맺어진 가족 등장, 연대와 친밀함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다.


■ 일·돌봄의 불균형, 불행한 가족

남성의 노동, 여성의 돌봄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가족을 구성한다는 건 남녀 모두에게 억울함과 부담을 지는 일로 인식된다. 대학생 장현석씨(24·가명)는 “아버지는 평생 4인분의 몫을 했지만 나는 1인분의 몫을 할 자신도 없다”고 말했다. 유치원생 아들을 둔 이은희씨(33·가명)는 “사내커플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는데, 부부싸움할 때 남편이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고 들먹거려 애정이 식는다. 남편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건 안다”며 “주변인에게 결혼하지 말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일과 돌봄이 불균형한 상태에서 유지되던 가족들은 평상시에도 불행하지만 노후가 되면 극적인 위기를 맞는다. 지은숙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원은 지난해 한국여성민우회를 통해 부모를 돌보는 비혼여성 20명을 인터뷰하며 알게 된 사실을 들려줬다.

돌봄과 가족의 문제 해결 하려면
돌봄의 재구성을 정치의 목표로
끊임 없는 논의 과정 만들어야

“스무 명 모두 ‘네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바로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로부터 돌봄을 넘겨받은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연락한 것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일본이라면 아내를 돌볼 책임은 우선 남편에게 있다. 남편이 혼자 돌보다 힘에 부치면 자녀들을 찾는다. 일본과 비교해서도 한국의 가족이 부부간 애정보다, 친자관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돌봄의 위기는 돌봄의 가치를 무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지 연구원은 “가족은 임금, 회사는 성과 중심으로 운영된다. 돌봄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 중에서도 밖에서 높은 임금을 받는 남성 가장은 돌봄에서 제외되고, 돌봄에 무능해진다. 결국 돌봄은 여성에게 집중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극단적 불균형 상태에 놓인 돌봄에 대해 무지, 무관심, 무인정의 ‘3무 돌봄’이라고 표현했다. 지 연구원은 “부부돌봄이 일반화되면 함께 살던 남편이 돌보면 노후를 집에서 보낼 수 있고 지역 커뮤니티 중심으로 돌봄체계를 짤 수 있다. 부부돌봄이 없는 문화라면 결국 시설을 택하게 된다”고 전했다.

돌봄을 극단적으로 저평가하는 사회는 돌봄의 사회화를 통한 해결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지난해 기준 요양보호사의 월 평균 급여는 60만원이다. 일본의 요양보험격인 개호보험료가 약 5만원 수준인데, 한국에서는 몇천원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돌봄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사회에서, 가구의 주소득원들은 돌봄을 위해 사회보험료를 지출하는 데 인색하고, 돌봄서비스의 질은 나빠진다. 돌봄종사자들에게 학대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돌봄 비용을 대기 위해 장시간 일하는 남성, 일도 하면서 돌봄도 병행하는 여성, 열악한 돌봄시설에 맡겨진 노인과 아이 모두에게 돌봄의 위기는 피할 길이 없다.

■ 돌봄의 재정의·돌봄의 재구성

돌봄은 부담이지만 한편으로 권리이기도 하다. 오는 4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 예정인 교사 이보라씨(32)는 아이를 기르며 육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고민스러워 낳지 않을 것도 생각했다. 막상 낳아보니 젖 먹고 잠든 아기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아기에게는 가족의 손길이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말하는 것이 ‘네가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아이는 전적으로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대답으로 돌아올까봐 꺼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해결책은 돌봄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지은숙 연구원은 “과거에는 성평등을 위해 여성도 남성처럼 노동시장에 내보내는 전략을 택했지만, 여성은 일과 돌봄 두 가지 의무를 떠안게 되고, 인간은 친밀함과 애정에 기초한 비공식 돌봄이 필요하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며 “남성이 여성처럼 돌봄의 영역으로 적극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보다 민주적인 가족관계도 필요
친밀하되 정서적 부담은 줄이고
남성이 적극적으로 돌봄 참여해야

김희강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돌봄의 재구성을 정치의 주된 목표로 삼고 헌법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기존의 정치이론에는 돌봄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다. 자유주의 관점에서는 돌봄은 알아서 해야 할 일로 여겼고, 공동체주의 관점에서는 가족에 헌신적으로 전담해야 할 일이 됐다. 이러한 관점으로는 돌봄과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정치권부터 나서 우리 사회의 주된 원리가 돌봄이라고 선언하고, 돌봄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는 과정을 국가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돌봄을 재구성하려면 가족관계도 변해야 한다. 2014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행한 <가족의 미래와 여성가족정책 전망 보고서>에서는 가족을 실선과 점선으로 비유했다. 친밀하지만 정서적·경제적인 부담이 적은 가족은 ‘느슨한 점선으로 네트워크처럼 연결된 가족’이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가족관계는 보다 민주적이 돼야 한다. 민주적인 가족은 느슨하게 점선으로 네트워크처럼 연결된 가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방영된 tvN 드라마 <마더>는 모녀가 3대째 입양으로만 이뤄진 가족을 다뤄 반향을 일으켰다. 따뜻하고 지켜져야 할 보금자리로서 가족을 묘사하지만 혈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맺어진 가족이란 점이 화제가 됐다. 가족붕괴, 가족피로 등 얼음장 같은 환멸 아래에서도 돌봄과 친밀감에 대한 욕구는 흐르고 있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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