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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유엔에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선언(UNDROP·농민권리선언)’이 채택된 지 2년8개월이 지났다. 선언문은 소농, 소작농, 여성 농민, 농촌 이주 노동자 등을 ‘농민(Peasant)’으로 정의하고, 이들이 종자, 토지 등 생산수단을 이용할 권리,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 추방되지 않을 권리, 지역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 등을 명시했다. 전세계 농민단체들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La Via Campesina·농민의 길)’ 안에서 2000년대 초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유엔에서 선언으로 채택되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 전세계 농민단체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 회원들이 2017년 유엔인권이사회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 앞에서 ‘농민권리선언을 채택하라’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분홍색 깃발을 든 이가 김정열 비아 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대표.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공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 전세계 농민단체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 회원들이 2017년 유엔인권이사회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본부 앞에서 ‘농민권리선언을 채택하라’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분홍색 깃발을 든 이가 김정열 비아 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대표.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공

“농촌 사람들은 빈곤에 빠져있고, 기후 변화로 더 많이 고통을 받고 있어요. 농지는 사라지고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농촌에 오지 않으려고 하죠. 이주 노동자들은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요. 우리 농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예요. ‘농민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는 농민들의 지적에 대해 유엔도 공감하고 농민권리선언을 채택하기에 이른 것이죠.”

경북 상주 농민 김정열씨는 유엔인권이사회가 2018년 봄 ‘농민권리선언’ 채택을 위한 실무 그룹 회의를 열었을 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회원이자 비아 캄페시나의 동남·동아시아 대표로서 회의에 참여했다.

김정열 농특위 농민권리선언포럼 대표. 현재 경북 상주에서 농사를 짓는 김정열 대표는 여성농민단체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으로, 전세계 농민단체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의 동남·동아시아 대표를 맡고 있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공

김정열 농특위 농민권리선언포럼 대표. 현재 경북 상주에서 농사를 짓는 김정열 대표는 여성농민단체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소속으로, 전세계 농민단체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의 동남·동아시아 대표를 맡고 있다.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제공

그해 12월17일 열린 제 73차 유엔총회에서 121개국의 찬성으로 선언문이 채택됐지만, 농림축산식품부 등 관련 부처는 ‘국내 법 검토’ 등 후속 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신 전여농 등 농민운동단체들과 인권운동단체, 연구자들은 ‘유엔농민권리선언포럼’을 만들고, 국가인권위원회와 함께 선언문을 번역하고 농민들에게 배포하는 등의 작업을 벌였다. 유엔의 선언문 채택 2년4개월이 지난 올해 4월, 대통령 자문기구인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농특위)에도 ‘농민권리선언포럼’이 만들어졌다. 김씨는 민관 위원 18명이 참여하는 포럼의 대표를 맡았다. 이들은 국내법 중에서 농민권리선언과 상충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법을 어떻게 개정해야 하는지 등을 정리하고, 농민의 권리가 침해된 사례 등을 조사하는 일을 벌인다.

2018년 4월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농민권리선언’ 실무그룹 5차 세션의 4번째 회의에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KWPA) 회원이자, 비아 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대표인 김정열 씨가 발언하고 있다. | UN WEB TV 갈무리

2018년 4월 스위스 제네바 유엔 본부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 ‘농민권리선언’ 실무그룹 5차 세션의 4번째 회의에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KWPA) 회원이자, 비아 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대표인 김정열 씨가 발언하고 있다. | UN WEB TV 갈무리

2018년 12월 17일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 73차 유엔총회에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선언(농민권리선언)’이 찬성 121표, 반대 8표, 기권 54표로 채택됐다. 한국 정부는 기권표를 던졌다. | UN WEB TV 갈무리

2018년 12월 17일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 73차 유엔총회에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선언(농민권리선언)’이 찬성 121표, 반대 8표, 기권 54표로 채택됐다. 한국 정부는 기권표를 던졌다. | UN WEB TV 갈무리

“유엔인권이사회 논의 당시 우리 정부는 농민권리선언 내용 중 ‘법적인 지위가 없는 이주노동자들까지도 농민과 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부분(선언문 제 1조)에 대해 동의하기 어렵고, ‘농민에게 종자 판매의 권리가 있다’는 조항(선언문 제 19조)는 국내 종자산업법 등과 상충하기 때문에 찬성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어요. 유엔 총회 표결에서도 기권표를 던졌죠. ‘공공 토지 등을 소농, 청년, 농촌 노동자 등에게 우선적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내용(선언문 제 17조 6항)에 대해서도 ‘한국은 정부 수립 후 토지개혁이 진행됐기 때문에 한국 상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이제 농민권리선언이 채택됐으니 이들 국내법부터 따져 보는 게 우선이겠죠.”

부재지주가 많은 현재 농지 소유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각종 법률을 어떻게 정비할 것인가, 불량종자 보급을 막고 종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만든 종자산업법이 소농들의 토종종자 거래를 막고 종자기업에 결국 종속되게 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 쉽지 않은 문제들을 풀어야 한다.

세계 농민단체들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발행한 ‘농민권리선언’ 책자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은 제 1조(ARTICLE 1)에서 소농과 소작농,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다. | 출처: 비아캄페시나. https://viacampesina.org/wp-content/uploads/2020/04/UNDROP-Book-of-Illustrations-l-EN-l-Web.pdf

세계 농민단체들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발행한 ‘농민권리선언’ 책자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은 제 1조(ARTICLE 1)에서 소농과 소작농,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다. | 출처: 비아캄페시나. https://viacampesina.org/wp-content/uploads/2020/04/UNDROP-Book-of-Illustrations-l-EN-l-Web.pdf

세계 농민단체들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발행한 ‘농민권리선언’ 책자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은 제 10조(ARTICLE 10)에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참여권’을 보장한다. | 출처: 비아캄페시나. https://viacampesina.org/wp-content/uploads/2020/04/UNDROP-Book-of-Illustrations-l-EN-l-Web.pdf

세계 농민단체들의 연합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발행한 ‘농민권리선언’ 책자 갈무리. 농민권리선언은 제 10조(ARTICLE 10)에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참여권’을 보장한다. | 출처: 비아캄페시나. https://viacampesina.org/wp-content/uploads/2020/04/UNDROP-Book-of-Illustrations-l-EN-l-Web.pdf

농특위 농민권리선언포럼은 오는 9월 충북 괴산과 진천에서 ‘현장 포럼’을 진행하기로 했다. 두 곳은 현재 개발 정책 등이 추진되는 지역으로, 현지 농민들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자신들의 ‘참여권’이 침해됐다고 주장한다. 농민권리선언은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토지·생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사업, 또는 계획의 준비·시행 단계에서 적극적이고 자유롭게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선언문 제 10조)’고 명시한다. 김정열 대표는 “많은 농촌 지역에서 개발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당사자로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되는 농민들은 참여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한국 사회가 농민들의 참여권을 ‘권리’라고 보지 않는다. 농촌 현장에서 포럼을 열어 이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유엔이 채택한 농민권리선언은 강제성이 없다. 향후 유엔에서 농민권리선언에 대한 후속 작업들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논의를 주도한 비아 캄페시나는 각국 정부가 정기적으로 유엔에 이행상황을 보고하도록 강제하거나, 유엔에 농민 권리 특별보고관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정열 대표는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은 각 국가가 인권법의 틀을 만드는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다. 농민권리선언도 농업과 농촌, 노동, 먹거리 등 관련 법들의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이 선언을 우리 법과 제도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이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 '농민인권선언' 영문 원본, 국문 번역본 바로가기
▶https://www.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menuid=001003007007&pagesize=10&boardtypeid=7065&boardid=7604395


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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