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밭

로컬라이프

메일쓰기

텃밭일기③

6살 아이와 함께 배추와 무 모종을 사러 갔다. 인근 종묘사에서 배추 20포기, 무 10포기, 빨간무 5포기를 구했다. 사진에 보이는 모종은 3포기에 1000원하는 배추 모종. 8월 14일 촬영.

6살 아이와 함께 배추와 무 모종을 사러 갔다. 인근 종묘사에서 배추 20포기, 무 10포기, 빨간무 5포기를 구했다. 사진에 보이는 모종은 3포기에 1000원하는 배추 모종. 8월 14일 촬영.

배추가 사라졌다. 텃밭에 심어둔 배추 모종 스무 포기 중 일고여덟 포기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훔쳐갈 게 없어서 배추 모종을 훔쳐가? 지난 4월 ‘상추 모종 실종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서리꾼이 다녀갔구나 싶었다. 당시 아이가 심은 청상추 모종 두 포기가 사라졌는데, 누군가 상추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흙까지 파서 모종째 가져가는 ‘대담함’을 보였다. 옆 텃밭도 같은 일을 겪었는지 텃밭에 ‘제발 좀 뜯어가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붙여놨다. 청상추가 사라진 날, 텃밭 농사를 함께 하는 ‘농사 메이트’ 장모님이 말했다. “이 서방, 그래도 한 포기에 2000원 하는 곰취 안 심은 게 어디야. 그거 잃었으면 정말 속 쓰릴 뻔했네.” (청상추 모종은 한 포기에 200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을 텃밭 농사의 ‘꽃’이라고 하는 배추 아닌가. 파종했던 무와 배추가 잘 자라지 않아서 종묘사에서 모종을 구해 다시 심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배추 모종 20포기, 무 10포기, 빨간무 5포기를 3평 텃밭에 심으려고 토마토까지 뽑아냈다. (잘 자라고 있는 당근, 가지, 고추, 파프리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이번 겨울 김장 걱정은 없겠다 싶었는데 그런 배추가 9월 초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텃밭에 배추와 무 모종을 심었는데, 배추 모종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9월 5일 촬영.

텃밭에 배추와 무 모종을 심었는데, 배추 모종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9월 5일 촬영.

장모님이 남아있는 배추들을 살폈다. “이 서방, 누가 가져간 게 아니야. 벌레가 다 먹어버렸네.” 과연 배추 이파리에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이 정도면 배추들이 광합성을 못할텐데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누군가 훔쳐간 게 아닌가 생각했던 자리(위 사진)에도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배추들이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 먹었나. 배추흰나비애벌레인가, 아니면 달팽이인가. 그렇게 큰 놈들은 보이지 않는데? 이파리를 들춰보니 아주 작은 벌레들만 몇 마리 눈에 띄었다. 다른 텃밭 동정을 살피고 온 장모님이 말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냐. 이 주변에 배추 심은 텃밭들은 죄다 이 모양이거든. 근데 저쪽에 있는 텃밭은 농사가 아주 잘됐어. 따라와 봐.”

‘농사 메이트’ 장모님이 벌레 먹은 배추 잎을 살피고 있다. 9월 5일 촬영.

‘농사 메이트’ 장모님이 벌레 먹은 배추 잎을 살피고 있다. 9월 5일 촬영.

누군가 훔쳐간 게 아닌가 생각했던 그 자리에도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배추들이 남아 있었다. 9월 5일 촬영.

누군가 훔쳐간 게 아닌가 생각했던 그 자리에도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배추들이 남아 있었다. 9월 5일 촬영.

그 곳엔 두 팀이 배추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 텃밭은 배추가 구멍 하나 없이 멀쩡했다. 60대 부부가 키우는 텃밭이었다. “여기 약 안 치면 (농사) 안돼요. 잎에 구멍 여러 개 뚫는 녀석은 ‘벼룩잎벌레’라고 하는 놈인데 시커먼 게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아요.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쭉 뛰어요. 그런 놈들을 어떻게 잡아요? 약 뿌리면 잘 죽으니까 약방 가서 살충약 달라고 해서 뿌려봐요.” 그 말을 들은 강원도 철원 농부의 딸인 장모님이 맞장구를 친다. “그럼 그렇지. 배추는 그렇게 농약을 쳐야 한다니깐. 전원일기 봐 봐. 김회장네도, 복길이네도 다들 그렇게 농사 짓잖아.” 하지만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이곳 주말농장은 화학농약 살포가 금지돼 있다.

다른 팀은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부부였는데, 배추 잎사귀마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잎에 작은 구멍이 몇 개 나 있는 것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지금 뿌리는 게 소주거든요. 소주와 물을 일 대 일로 섞었어요. 이틀에 한번 와서 주고 가요. 이렇게 뿌리면 벌레가 이파리를 먹긴 먹는데 덜 먹죠. 안 그러면 모조리 먹어치운다니까요.” 유튜브를 검색해보니 그 부부처럼 소주와 물을 섞거나, 막걸리와 사카린을 섞어 천연살충제를 만든다는 영상들이 꽤 있었다.

배추 잎에 벼룩잎벌레들이 붙어있었다. 조그만 날벌레 같은 녀석이 배추 잎에 많은 구멍을 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9월 5일 촬영.

배추 잎에 벼룩잎벌레들이 붙어있었다. 조그만 날벌레 같은 녀석이 배추 잎에 많은 구멍을 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9월 5일 촬영.

벼룩잎벌레. 날개 딱지에 황색 세로띄무늬가 있는 놈이다. 9월 5일 촬영.

벼룩잎벌레. 날개 딱지에 황색 세로띄무늬가 있는 놈이다. 9월 5일 촬영.

우리 텃밭 배추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는데, 집에 돌아와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니 ‘잡았다, 이놈!’ 농약 치는 텃밭러가 말했던 ‘벼룩잎벌레’가 사진에 찍혔다. 날개 딱지에 황색 세로띄무늬가 있는 놈이다. 조그만 날벌레 같은 녀석이 배추 잎에 자기 몸집보다 큰 구멍을 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잎 뒷면을 찍은 사진에는 진딧물도 제법 많이 보였다.

항상 뭔가 일이 터지고 나서야 뒤늦게 펴보는 책 <텃밭매뉴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배추를 노리는 벌레(벼룩잎벌레, 무잎벌레, 달팽이, 담배거세미나방애벌레, 배추흰나비애벌레)를 조심하자. 배추 농사의 성패는 모종을 옮겨심고 한 달 정도의 성장에 달렸다. 일주일에 한 번은 깻묵액비와 목초액, 미생물 농약(친환경 방제약)을 뿌려주자.’ 이 내용에 따르면, 모종을 옮겨심은 지 한 달이 된 내 배추 농사는 이미 망한 거나 다름 없다.

남아있는 내 배추들 살릴 길은 없을까. 충남 홍성에서 유기농을 하는 ‘멘토’ 농부님께 조언을 구했다. “친환경 약제를 써야지. 인터넷 들어가보면 ‘톡깍이’라는 약이 있어. 그게 벼룩잎벌레 잡을 때 쓰는 유기농 약제야. ‘님(Neem)오일’을 섞어서 써 봐. 님오일을 섞으면 효과가 더 좋고 약효가 오래 지속되더라고. 님오일을 못 구하면 톡깍이만이라도 뿌려봐.”

톡깍이를 검색해보니 농촌진흥청에서도 배추 키울 때 사용하는 유기농 방제약으로 추천하고 있었다. 님오일은 님나무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항균과 살충 작용이 있어 님나무가 많이 자라는 인도에서는 예부터 민간요법으로 활용돼 왔다. 한 다국적 기업이 1995년 님나무 추출물로 항균제품을 만들어 특허를 따내자 인도의 농민들이 ‘인도의 생물자원과 전통지식을 도둑 맞았다’며 소송을 제기해 특허를 무효로 만들기도 했다. 인도의 생태철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다국적 기업들이 자연자원과 원주민들의 지식을 이용해 특허권을 따내는 행위에 대해 ‘생물해적질(Biopiracy)’이라며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도 농민의 투쟁의 상징이기도 한 ‘님오일’이 텃밭 유기농 배추농사에 활용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님나무. 사진출처 Madhav Malleda/ Unsplash

님나무. 사진출처 Madhav Malleda/ Unsplash

내 텃밭 사진을 본 농부님이 말했다. “심어만 놓으면 크는 게 아니야. 매일 매일 들여다보고 애지중지해야지. 배추는 하루가 다르게 벌레가 붙어서 다 갉아먹거든···.” 뜨끔했다, 사실 2주일 만에 간 텃밭이었다. 상추는 물만 줘도 잘 자라길래 배추도 그럴 줄 알았다. 벌레들 식욕이 그렇게 왕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기자, 보내준 사진들 보니까 배추만이라도 다시 심는 게 좋을 것 같아. 무는 이미 시기가 지났고, 배추는 아직 (시기가) 남았거든···.”

인근의 종묘사·농약사들에 전화를 걸었더니 9월에는 배추 모종을 팔지 않는단다. 톡깍이와 님오일도 없다. 그게 뭔지 모르는 농약사가 더 많았다. 도시에서 친환경으로 텃밭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농사지으라는 거지? 일단 유기농 방제약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남아있는 배추와 무라도 살려보기로 했다. 과연 살릴 수 있을까. 다음 텃밭일기 연재는 가능할까. 아내가 말했다. “근데 당신, 텃밭에 매일 갈 자신은 있어?”


글·사진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