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오전 10시20분

택시를 타고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로 가는 길에 검문검색이 있었다. 효자로 위에서 근무 중이던 경찰관이 택시를 세워 뒷좌석에 앉은 나에게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분수대 앞에 갑니다.” “왜 가시죠?” “기자입니다.” “기자회견에 가시나요.” “…네네.” 대충 둘러대며 답을 하니 길을 터줬다.

어렵게 분수대 앞 공원에 도착했다. 양복을 입은 남성 두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나요?” “기자입니다.” 질문은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어디 소속인지, 무슨 일이 있는지, 혼자 온 것인지 등을 물어보았다. “신고되지 않은 기자회견이나 집회가 있을 수 있어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청바지에 나름대로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수상하게 보였나보다.

양복 남성들은 청와대 주변을 경호하는 202경비단 소속의 경찰관들이다. 청와대는 경외를 202경비단이, 경내는 101경비단이 맡아 경비·경호를 선다. 경호처의 업무를 지원하는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경찰부대다. 202경비단은 여름엔 어두운 반팔셔츠, 겨울엔 어두운 자켓를 입고 근무를 선다. 101경비단은 임무에 따라 다른 제복을 입는다.

이들이 길가던 사람들은 붙잡고 꼬치꼬치 캐묻는 건 청와대 분수대 앞이 늘 1인 시위나 집회, 기자회견을 하는 이들로 분주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앞 분수대는 다양한 요구사항을 외치는 이들로 늘 번잡하다.

청와대 분수대 앞 공원 한 켠에는 대고각이 있다. 1993년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의 글이 대고각 앞 돌판 위에 새겨졌다. 이 북은 신문고의 옛얼을 담아 제작해 기증받은 북이다. 신문고는 억울한 일을 나랏님에 호소하기 위해 두드리는 북이었다. 대고각에는 “전시용 북”이라는 안내와 함께 “북을 치거나 두드리지 마세요” 라는 경고가 쓰여있다.

‘네이버 지도’의 위성 지도 기능에선 청와대 위치가 나무로 뒤덮여진 채 가려져 있다. 네이버 지도

‘네이버 지도’의 위성 지도 기능에선 청와대 위치가 나무로 뒤덮여진 채 가려져 있다. 네이버 지도

구글이 제공하는 지도 서비스 ‘구글 맵’에서는 청와대를 찍은 항공 사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구글 맵

구글이 제공하는 지도 서비스 ‘구글 맵’에서는 청와대를 찍은 항공 사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구글 맵

‘청와대’라는 말에서는 보안, 기밀, 경호… 등의 단어가 연상된다. 청와대의 위치나 내부 모습은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국내 포털사이트 네이버 위성 지도에서 청와대의 모습은 나무로 가려진 것처럼 표시됐다. 미국 업체 구글이 제공하는 지도에선 청와대의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화창한 화요일(29일)인 이날은 평소와 달리 분수대 주위가 한가했다. 팻말을 든 시위대 2명이 눈에 띄었다.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이와 계란이력제 전자신고를 반대하는 이. 분수대 주변에는 각종 집회와 시위에 썼을 법한 팻말들이 여기저기 놓였다.

사랑채 앞 분수대는 다양한 조각들로 꾸며졌다. 가운데에는 지도자를 상징한다는 봉황이 지구를 상징하는 동그란 구형 조각 위에 앉아 있다. 이 봉황의 주위로 팔뚝이 굵고 건장한 남성과 어질고 상냥한 미소를 띈 여성, 그들 품에 안긴 명랑한 어린아이의 동상이 4세트가 서 있었다. “평화와 자유, 번영을 구가하는 단란한 국민상”을 나타낸 것이다. 분수대는 1985년 11월18일 세워졌다.

경복궁 후문 역할을 하는 신무문을 등지고 서면 청와대 본관이 멀찍이 보인다. 경비를 서고 있는 101경비단 소속 경찰관의 모습도 보인다.

경복궁 후문 역할을 하는 신무문을 등지고 서면 청와대 본관이 멀찍이 보인다. 경비를 서고 있는 101경비단 소속 경찰관의 모습도 보인다.

■오전 10시48분

청와대 분수대에서 동쪽 경복궁 방향으로 가면 ‘청와대로’가 이어진다. 청와대로의 경복궁 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경복궁의 후문 역할을 하는 신무문이 나온다. 이곳에선 청와대 본관이 멀리 보인다. 출입문은 단단히 잠겨있고 제복 경찰관들이 보초를 선다.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해 바닥에 차단 장치도 설치됐다.

다시 길을 걷다보면 신호등이 나온다. 건널목을 건너면 청와대 직원들의 출입문인 연풍문이 나온다. 길을 건너려고 하니 “길이 막혔다”며 202경비단 경찰관이 제지했다. 건너갔다 다시 올 것이라고 해도 “길이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청와대로의 경복궁 쪽 돌담길과 청와대 담장길은 몇 걸음이면 건널 수 있지만, 일반인은 길 위에 서지도 못할 정도로 경비 태세가 철저하다.

청와대 동쪽 끝은 기자실 등이 있는 춘추관이다. 청와대로를 따라 다시 돌아가다니 길가에 핀 꽃이 그제서야 보였다.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이 “수선화도 폈다”며 둘러봤다. 푸른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청와대 주변에선 유독 하늘이 맑게 잘 보였다. 경호 문제로 고층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시선이 막히지 않는다. 개발이 쉽지 않아 오래된 나무들도 많다. 이날은 서울시 관계자들이 교황청 대사관 근처에 자리한 415년된 보호수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높은 건물이 없는 대신 저층 주택과 빌라들이 청와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청와대 직원들이 관사로 쓰는 곳도 있다. 주택들은 대개 평범한 외관을 하고 있지만 왠지 비밀스런 목적을 갖고 있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드는 곳도 있다. 이런 생각의 배경은 청와대 서쪽의 무궁화동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와대 서쪽 시화문 앞에는 과거 궁정동 안전가옥을 헐고 만든 무궁화 동산이 있다.

청와대 서쪽 시화문 앞에는 과거 궁정동 안전가옥을 헐고 만든 무궁화 동산이 있다.

1993년 2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궁정동 안전가옥(안가)을 헐어내고 조성한 공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총에 맞아 숨진 게 이곳이라고 한다. 인근에는 존재 자체가 비밀인 안가들이 더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많은 안가들이 숨어있다 해도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하면 따라서 없어질 게 뻔하다.

■오전 11시16분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예고된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이 청와대 관람을 신청했다.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함께 관람을 온 박재연씨(45) 부부는 두 번째 예약 끝에 관람을 오게 됐다고 했다. 코로나19로 관람이 어려웠는데, 최근 제한이 풀렸고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청와대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청와대 집무실 등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순 없지만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박씨의 딸은 “뉴스에서만 보던 건물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고 했다.

청와대 홍보관 역할을 하는 청와대사랑채의 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안내 문구. 사랑채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역사 박물관이 있다.

청와대 홍보관 역할을 하는 청와대사랑채의 전시실 입구에 설치된 안내 문구. 사랑채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역사 박물관이 있다.

청와대 관람은 춘추관에서 시작된다. 이어 청와대 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인 여민관을 지난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시 집무실도 이곳에 있다. 여민관을 지나 녹지원, 구 본관터를 지나 본관과 영빈관까지 돈 뒤 시화문으로 나와 청와대 외부에 있는 칠궁을 둘러보고 분수대 앞에 있는 청와대 홍보관 격인 사랑채로 향하면서 관람일정이 끝난다.

친구와 함께 관람 온 김주원씨(20)는 한달 전 쯤 청와대 관람을 신청해 오게 됐다고 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청와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청와대의 이름을 나타내는 본관의 푸른 기와였다. “신문에서 봤을 때는 파란색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청록색의 오묘한 빛을 띄고 있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기념품으로 지갑과 머그컵을 받았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에 대해 김씨는 “미국에 백악관 같은 고유의 기관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대통령 집무실로서 청와대가 존재하는 게 나쁘지 만은 않은 것 같다”며 “한편으로는 ‘구중궁궐 같다’는 비판도 이해는 돼 (집무실을) 옮기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청와대가 시민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청와대 관람도 하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이전을 하게 되더라도 세금 좀 아껴서 쓰면서 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분수대 앞은 오전 내내 조용했다. 한 보수 유튜버가 휴대용 스피커를 이용해 소리치며 방송을 한 잠시를 빼면 고즈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없이 홀로 있던 한 시위 팻말에는 “이곳은 지난 5년간 억울한 일인시위자들의 지옥이었다. 이 지옥을 방치하고 용산에 새로운 지옥을 만들려고 하느냐?”라고 써 있었다.

청와대 분수대 앞에 세워져 있던 시위 팻말.

청와대 분수대 앞에 세워져 있던 시위 팻말.

청와대에서 효자로를 따라 내려가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로 쓰는 대통령인수위원회가 나온다. 통의동 집무실과 청와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인수위 앞 도로 양쪽에는 다양한 현수막과 팻말들이 걸렸고 인파들이 몰려 저마다 다양한 구호를 외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볼 수 있던 장면이었다. 한 쪽에선 노동자들의 불법해고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다른 쪽에선 코로나19 백신 접종 정책 문제를 지적하는 집회가 열렸다. 봄볕이 따뜻했다. 모두에게 봄이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대통령 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는 평소라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모였 집회·시위를 인파가 몰려들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대통령 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는 평소라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모였 집회·시위를 인파가 몰려들었다.

청와대와 통의동 사이… 분수대앞 시위가 사라졌다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