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2022년 3월31일, 만 60세 정년을 맞게 된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 김하경씨. 그는 이날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전현진 기자

2022년 3월31일, 만 60세 정년을 맞게 된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 김하경씨. 그는 이날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전현진 기자

‘사업주는 근로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하여야 한다.’ (고령자고용법 제19조1항)

“오늘이 제 정년 날이라고 합니다.”

꿈 꾸던 모습은 아니었다. 시원하고 섭섭한 기분으로 마지막 작업을 한 뒤 일터를 떠나야 했을 그날. 그는 거리에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2022년 3월31일의 아시아나케이오 해고 노동자 김하경씨(60)는 길 위에서 정년을 맞았다. 집에 가는 대신 밤새 농성장을 지켰다.

오전 5시30분,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양치도 하고 옷도 갈아입는다. 긴머리는 질끈 묶었다. 인천 계양구의 집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에 한 대씩 오는 마을버스를 타야한다. 썬크림, 비비크림에다 몇몇 짐을 챙긴 뒤 오전 6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인천 지하철 갈산역에 내려 열차를 타고 부평역에서 ‘용산행 특급’으로 갈아탔다. 용산역에선 다시 서울 시내로 향하는 열차로 바꿔탔다.

회사에 다닐 때는 통근버스가 있었다. 매일 앉아서 40여분이면 일터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노래도 곧 잘 들었다. 몇 년 전 지인이 추천해줘 듣게 된 양준일의 <리베카>란 곡을 좋아했다. 요즘은 통 노래를 들을 수 없다. 노래 한곡 쯤 들을 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요즘은 <단결투쟁가> 같은 민중가요가 BGM이 됐다.

1시간 반 넘게 걸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 내린 게 오전 8시쯤이다. 이날도 어김없이 종각역 3-1번 출구 앞,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있는 센트로폴리스빌딩 앞에서 선전전을 벌였다. 함께 해고된 김계월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조합 지부장과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지원 나온 김순희·김선이 활동가가 함께 했다.

“복직판정 이행이 일상회복이다” “해고노동자 우롱하는 아시아나케이오 규탄하다”고 쓰인 팻말을 들었다. 매일 오전 이 자리에 있었지만, 출근 중인 사람들은 이들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스쳐갔다. 잠시 쳐다본 이들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눈길을 돌린다.

오전 9시가 되자 선전전을 마치고 농성장으로 향했다. 하경씨는 걸음이 빨랐다. 몸집은 작지만 날렵하게 걸었다. 평소에 등산을 좋아해서 단련이 됐다. 투쟁으로 바빠도 일주일에 하루는 동네에 있는 계양산에 오른다. 운동하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더 힘들다. 어린 시절 큰아들이 “엄마! 계양산에 도전해보세요. 저도 끝까지 올라갔어요” 한 게 시작이었다. 걸음에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그의 성격이 드러났다. 하경씨는 “내가 O형이라…”며 웃었다. 요즘 유행하는 대로라면 I보다는 E에 가깝다.

■보라색 장갑과 맥심 한 잔

하경씨는 보라색 후드티와 스카프를 걸쳤다. 늘 챙기는 보라색 장갑도 꼈다.

“손이 안 이뻐서….”

장갑을 안 낄 때는 두 손을 모아 손을 감추는게 습관이 됐다. 그가 일했던 아시아나케이오는 항공기 객실 청소 등의 업무하는 회사다. 하경씨는 오랜 노동으로 손가락 관절이 휘었다고 했다. 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부끄러움이 많아진다. “해고 뒤에는 일을 안 해서 많이 좋아진 거야.” 왼손 약지엔 금빛 반지를 끼고 있었다. 둘째 아들이 맞춰준 남편과의 커플링. 첫째 아들은 “엄마의 손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했다.

“못 나서 부끄럽다”며 가리고 다녔던 김하경씨의 손. 항공기 객실 청소 등 작업을 하면서 손가락 마디가 휘었다. 왼손 약지의 금반지는 작은 아들이 지난해 남편과의 커플링으로 맞춰준 것이다.  전현진 기자

“못 나서 부끄럽다”며 가리고 다녔던 김하경씨의 손. 항공기 객실 청소 등 작업을 하면서 손가락 마디가 휘었다. 왼손 약지의 금반지는 작은 아들이 지난해 남편과의 커플링으로 맞춰준 것이다. 전현진 기자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은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이 있는 장교빌딩 앞에 자리잡았다. 비닐 천막 안에 대형 팔레트로 킹사이즈 침대 2개 정도 크기의 평상을 만들었다. 이곳에 이불과 전기장판을 깔아두고 생활한다. 천막 안에는 “원직 福직, 새해 福”이라는 글귀가 씌여있는 난이 놓였다.

가스버너와 동그란 스테인레스 주전자는 농성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물품이다. 기름을 채워 쓰는 발전기를 매번 사용할 수는 없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 ‘카누’나 ‘맥심’을 타서 마신다. 하경씨는 해고 이전에도 작업을 할 때면 맥심을 마시고 기운을 냈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이 농성하는 천막. 소음과 매연이 심해 안에서 쉬려고 해도 침낭을 덮어 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전현진 기자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이 농성하는 천막. 소음과 매연이 심해 안에서 쉬려고 해도 침낭을 덮어 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전현진 기자

■이제는 익숙해진 “투쟁”

장교빌딩 지하1층에는 ‘맛사랑 식당’이 있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은 이곳에서 하루 세끼를 모두 챙겨 먹을 때가 많다. 사장님은 ‘케이오 식구들’이라고 부른다. 마흔가지가 넘는 메뉴 중 하나를 고르는 건 늘 힘들다. 하경씨는 이날 고민 끝에 아침 식사로 ‘청국장 비비기’를 골랐다. 청국장 한 뚝배기와 비벼먹을 그릇이 함께 나왔다. 식사를 하면서 사장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농성장에서 품고 온 2L 페트병 두개를 식당 한켠으로 가지고 갔다. 패트병 뚜껑에 빨간색으로 ‘생수’라고 적어뒀다. 식당에서 준비해둔 수도관으로 생수를 받아둔다. 매일 생수를 사먹을 수 없으니 식당에 양해를 구하고 물을 받아간다. “매일 신세를 지는 것 같고,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김하경씨가 농성장 앞 장군빌딩 지하 식당가에 있는 맛사랑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미리 준비한 생수통에 물을 받고 있다. 하경씨는 “매일 신세를 지는 것 같고,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전현진 기자

김하경씨가 농성장 앞 장군빌딩 지하 식당가에 있는 맛사랑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미리 준비한 생수통에 물을 받고 있다. 하경씨는 “매일 신세를 지는 것 같고,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전현진 기자

천막으로 생수병을 가지고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잠시 쉴 수 있었다. 천막 앞 삼일대로는 밤낮 없이 버스의 굉음으로 가득 찬다. 짬을 내 눈이라도 붙이려면 도로의 소음과 매연에 익숙해지길 기다려야 한다.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경씨는 침낭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억지로 잠시 눈을 붙인다. 그는 늘 잠들지 못한다고 했다.

낮 12시쯤 택시노조와 연대하기 위해 하경씨와 김계월 지부장이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로 향했다. 거리엔 꽃이 피었다. 한 건물에 “봄이 왔어요”라고 쓰여있었다. “봄이 왔나….” 모처럼 눈을 들어 먼 데를 보던 하경씨의 말끝이 흐려졌다. 택시노조 조합원들은 세종시에서 시작해 도보 행진으로 청와대까지 걸어왔다. 택시기사 월급제를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전 법대로 시행해달라며 한 택시 노동자가 지난해부터 30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발언을 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열린 택시노조 집회·기자회견에 참여한 김하경씨. 경찰이 기자회견이 장소인 청와대 분수대 앞까지 통행을 제지하자 따로 떨어진 하경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전현진 기자

연대발언을 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열린 택시노조 집회·기자회견에 참여한 김하경씨. 경찰이 기자회견이 장소인 청와대 분수대 앞까지 통행을 제지하자 따로 떨어진 하경씨는 분통을 터트렸다. 전현진 기자

참가자들은 집회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위해 200m만 가면 있는 청와대 분수대로 향했다. 경찰은 길을 막아섰다. 조합원들이 맞춰 입은 조끼를 벗지 않으면 미신고 불법 집회라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좀 하자. 기자회견 할 사람들만 먼저 보내주면 되잖아!” 답답해 하던 하경씨가 소리질렀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종로경찰서 경비과장은 계속 경고 방송을 했다. “집단적으로 이동하는 미신고 집회는 불법행위입니다.”

주최 측과 경찰이 대치하다 결국 청운동주민센터 앞 도로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경찰은 불법집회라며 채증을 시작했고, 집회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하경씨는 연대발언자로 마이크를 쥐었다. 전에는 발언 내용을 휴대전화에 미리 적어두고 읽었는데, 화면이 갑자기 꺼진 경험이 있었다. 그 후로는 생각나는 대로 발언한다. 조금 더듬거리는 대목이 있었지만 “투쟁!”과 함께 발언을 마무리하는 게 꽤나 익숙한 듯 보였다.

택시노조 집회에서 연대 발언을 하는 김하경씨. 이제는 익숙하게 “투쟁!”이라고 외치며 발언을 마쳤다. 전현진 기자

택시노조 집회에서 연대 발언을 하는 김하경씨. 이제는 익숙하게 “투쟁!”이라고 외치며 발언을 마쳤다. 전현진 기자

■지문이 닳도록 열심이었던 삶

하경씨는 전남 화순에서 9남매 중 7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엄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 하며 살라고 복돋아줬다. 하경씨는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었다. 성실하게 보낸 덕에 회사에선 금반지도 해주고 저축상도 줬다. 전남 대표로 새마을운동연수원에 간 적도 있다. 그러다 탁구도 잘 치고 요리 솜씨도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전남 구례로 이사가 ‘멕시칸 치킨’ 가게를 차렸다. 지역 사람들한테는 ‘노고단 닭집’이라고 불리며 맛집으로 통했다. 닭도 튀기고 배달도 남편과 함께 했다. 배달하던 중 오토바이 사고가 났다.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앞으로 오토바이를 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가게로 업종을 바꿨다. 솜씨 좋은 남편이 일을 배워 광주에 가게를 열었다.

1996년쯤 초등학생인 아이들 교육 좀 시켜보겠다며 수도권인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다 자란 아이들은 “서울로 갔었어야죠”라며 농담을 한다. 인천에선 아파트 상가를 구해 가게를 열었다. 장사만 해서 쉬는 날도 따로 없었기 때문이지, 남들이 쉴 때 쉬고 일할 일 하는 직업이 갖고 싶었다. 그러다 등산하며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2013년부터 아시아나케이오에 입사해 인천국제공항에서 일했다.

2교대로 열심히 일했다. 수능 때 비행기가 안 뜨곤 했는데 그럴 때가 아니면 늘 일이 많았다. 힘들지만 성실히 일했다. 지난해 해고 투쟁 중 서울고용노동청에 들어갔다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다. 조사를 받을 때 지문이 찍히지 않았다. 일하면서 지문이 닳아 없어진 것이다. 하경씨는 “조사를 받으면서도 그게 참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 경위서 한 번 쓴 일도 없었다. 경찰서에 가거나 범칙금 한 번 내지 않았다. 그런 하경씨가 구치소에서 보낸 날은 무섭고 낯선 것이었다. “<7번방의 손님>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났다니까.” 하경씨는 아직도 경찰서에 끌려갔던 날을 이야기할 때는 “그 날”이라거나 “그 일”이라면 돌려말했다.

2020년 사측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영난을 이유로 무기한 무급 휴직에 동의하라고 했다. 이를 거부한 노조 조합원 8명을 정리해고했다. 하경씨는 조합원들과 싸워보겠다고 했다. 가족들도 응원해줬다. 서울행정법원은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를 해고한 사측의 행태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복직은 없었고 투쟁은 계속됐다. 그러다 경찰에 끌려갔으니 가족들도 하경씨를 걱정하며 말렸다.

2021년 4월14일 경찰이 서울고용노동청 입구를 봉쇄하자 김하경씨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이날 경찰은 하경씨와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을 연행했다.  /강윤중 기자

2021년 4월14일 경찰이 서울고용노동청 입구를 봉쇄하자 김하경씨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이날 경찰은 하경씨와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을 연행했다. /강윤중 기자

■거리에서 더 넓어진 하경씨의 세계

그래도 투쟁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다른 해고노동자들을 거리에서 만났다. “우리가 이렇게 끈질기게 싸우면 우리 같이 해고되는 사람들이 덜 생길 거 아니야. 회사들이 ‘우리도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 해서.”

거리에서 다양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과도 만났다. 가장 마음에 쓰였던 게 ‘플랫폼 노동자’들이었다. 치킨집을 운영하며 배달도 했던 하경씨가 ‘배달 앱’에 기대어 사는 음식점 자영업자들과 배달노동자들의 삶을 되뇌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얼마나 마음 졸이고 힘들고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안다.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경씨의 세계는 더 넓어져갔다. 투쟁을 멈춰선 안 되는 이유였다.

하경씨는 정년이 지났기 때문에 복직을 해도 일터에 돌아갈 수 없다. 오랜 투쟁에 몸도 마음도 지쳐만 간다. 예전 일이 생각난다. 20년을 일하고 정년 퇴직하는 ‘언니’가 있었다. 조회시간에 박수만 치고 보내려는 걸 보고 하경씨는 손을 들었다. “20년을 고생했는데 비행기 왕복 티켓이라도 선물해줘야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어차피 정년까지 10년도 일하지 못할 테니 내가 받아먹으려고 한 소리는 아닌 거 아시겠죠?”

정년만 되면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몇 해전, 동생과 대만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놀러다기도 하면서 정년을 보냈으면 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대신 거리로 ‘출근’하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김치도 못 담갔다. 배추나 마늘 같은 재료도 다 사뒀는데, 김치를 못 담근 게 올해가 처음이다. 사이 좋은 아들들은 농담처럼 “엄마가 아니라 계모네”하고 놀린다. 그러면서도 명절이 되면 “음식은 만들지 마세요”하고 말린 뒤, 식당으로 데려간다. 힘들게 싸우니 맛있는 것 사먹으면 된다고. 말 없이 지지해주는 가족들이 힘이 된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제52차 기도회에서 김하경씨 정년을 맞은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제52차 기도회에서 김하경씨 정년을 맞은 소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동지들’과 함께

이날 오후 5시,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매주 한번씩 열리는 기도회는 이날이 52차였다. 성경구절을 함께 읽고 찬송가를 불렀다. 정년을 맞은 소회를 이야기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하경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해고자라서 휴가는 못 가지만 정말 휴가를 가고 싶습니다.”

하경씨는 성경구절을 읽고 기도를 하는 모습이 익숙해보였다. 그동안은 교회를 못 갔지만 전에는 열심히 다녔다. 설교자의 ‘말씀 나눔’ 시간 전 기도회 참가자들이 민중가요인 <동지가>를 불렀다. 여러 번 들어본 듯 하경씨도 조용히 따라불렀다. 기도회 설교를 맡은 이는 함께 읽은 성경 ‘창세기’ 구절(“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을 이야기하고는 하경씨를 가리키며 “뒷세대에는 자본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생님의 이야기가 전해질 것”이라고 했다.

김하경씨의 정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거리에서 만나 알게 된 ‘동지’들이 케이크를 들고 농성장을 방문했다. | 김하경씨 제공

김하경씨의 정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거리에서 만나 알게 된 ‘동지’들이 케이크를 들고 농성장을 방문했다. | 김하경씨 제공

오후 6시쯤, 다른 일정이 없었다면 아침에 온 길을 다시 거슬러 귀가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경씨의 하루는 끝이 아니었다. 해고노동자들이 번갈아 가며 ‘천막지킴이’를 하는 날. 목요일은 격주로 여성 조합원들이 당번을 맡는다. 이날은 하경씨가 밤을 보내야한다. 다행히 혼자는 아니다. 거리에서 농성 투쟁을 하며 알게 다른 동료들이 놀러오기로 했다. 정년을 맞은 하경씨를 위해 맛집에서 케이크를 사들고 깜짝 파티를 하러 왔다. 꽃다발과 선물도 받았다.

천막에 하경씨까지 6명이 모였다. 노조 활동가부터 서울시의원까지. 하경씨는 이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평생 쓸 일이 없던 이 말은 거리에서 보낸 시간과 함께 어느새 익숙해졌다. 생판 모르던 이들이 거리에서 싸운다는 이유로 함께 힘을 보탰다. 싸우지 않았다면 알지 못 했을 이들이 서로를 응원하고 연대했다.

하경씨는 정년이라고 꽃과 선물을 많이 받은 게 고마우면서도 민망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다들 부자도 아니고 넉넉한 형편도 아닐 텐데…”라면서. 함께 하는 동지들은 “넉넉하지 않아서, 부자가 아니라서 서로 돕고 챙겨주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날 천막에서 하경씨와 함께 밤을 지샌 건 기록노동자 희정 작가다. 여성 조합원들이 천막을 지킬 때면 다른 여성 동지들이 자원해 함께 밤을 보낸다. 하경씨는 천막지킴이를 할 때면 함께 있어주는 동지들을 위해 먹을 것을 가져왔다. 이날도 닭똥집 튀김이며 과일 같은 간식거리를 싸 왔다. 늦은 밤 닭똥집 튀김이 너무 과한 것 같아 하경씨는 사과를 깎아줬다.

천막에서 정년의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내일도 오늘과 비슷한 하루가 이어질 테다. 주말에는 택시노조와의 연대 활동도 예정돼 있었다. 해고노동자에게 휴식은 마치 사치인 것처럼, 싸워야 될 일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출근해야 될 날이 얼마나 더 남았을지 기약은 없다. 그래도 서로 위로하며 싸워보자. 하경씨는 동지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길에서 맞은 '60세 정년'···해고노동자 김하경씨는 퇴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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