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노예를 가르는 기준

오민규 | 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자본가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은 없는 것 같다. 지난주에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이 근로기준법 개정안, 아니 개악안을 내놓았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더욱 확대해 노동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고, 통상임금 범위를 사실상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자는 내용은 애교 수준이다.

[세상읽기]인간과 노예를 가르는 기준

1주에 연장근로 한도를 기존 12시간에서 20시간으로 확대하자고 한다. 이건 휴일근로도 연장근로에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결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내용이며,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사회정의에 완전히 역행한다. 휴일근로(특근) 가산임금을 아예 없애자는 대목에선 어이가 없어진다. 자본가단체 경총조차 가산임금 얘기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해왔고 그나마도 ‘25%로 줄이자’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예 없애자고 나왔으니 자본가들이 만세삼창을 부를 상황이다.

이미 특수고용 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문제에서 자본의 이해를 충실히 대변했던 권성동 의원이 대표발의했다고는 하지만, 이번엔 당정협의까지 거친 것이라 하니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만에 하나 근로기준법이 개악될 경우, 그 피해를 입는 쪽은 미조직 노동자들이다. 노동조합을 가진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바뀌더라도 단체협약을 통해 가산임금을 비롯한 기존 권리가 유지된다. 하지만 미조직 노동자들은 송두리째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만다. 선거 때마다 빨간색 옷을 입고 ‘민생’을 외치며 지지를 호소해온 새누리당의 ‘쌩얼’이 바로, 가장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리부터 빼앗는 모습이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새누리당이 건드린 법이 노동조건에 대한 ‘최저기준’을 규정한 ‘근로기준법’이기 때문이다. 즉 노예와 인간을 구분해주는 최소한의 경계선이 바로 근로기준법이라는 말이다. 이 법이 명시한 내용에 미달하는 근로계약 부분은 모두 자동 무효가 된다. 따라서 이 법을 어긴 자는 ‘최저수준’조차 안 지킨 파렴치범으로 처벌하는 게 자연스럽다.

노동조합 보호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노예로는 내몰리지 않도록 하자는 게 이 법의 취지이다. 그런데 그 기준을 더 악화시킨다? 이건 인간과 노예의 경계를 허물자는 얘기나 다름없다. 사실 저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다. 절대로 건드려선 안된다고 믿어온 ‘최저기준’의 권위를 산산조각 내버리겠다는 것! 이렇게 가다 보면 임금의 최저기준을 규정한 최저임금법도 건드릴 게 뻔하다.

40여년 전 근로기준법전과 함께 온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와 함께 그가 마지막 외친 말은, 없는 법을 만들라거나 기존 법을 고치라는 게 아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즉 있는 법이라도 제발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 사회가 ‘최저기준’을 존중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게 있어야 인간을 기계나 노예와 구분해준다는 의미이다. 새누리당의 법안 발의에 민주노총은 물론이고 한국노총과 많은 시민사회단체들도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성명서 몇 장을 무서워할 저들이 아니다. 저들이 노리는 건 법조항 몇 개 통과가 아니라 ‘최저기준’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 따라서 악법을 막는 방법은 ‘최저기준’의 권위를 높이 세우고 사회 전체가 존중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지금부터 준비해 최저기준인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을 대폭 상향시키라는 요구를 내걸고 내년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최저임금을 시간당 1만원으로 인상하고,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시키며, 토요일도 일요일처럼 유급휴일로 인정할 것. 사실 이런 것을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내년이 안되면 내후년, 그것도 안되면 그 다음 해라도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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