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사유와 성찰]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선의의 사람들이 갖가지 ‘장기공익근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공전만으로 지탱되는 인생은 없다. 너나없이 자기를 돌볼 자전의 시간을 잊고 지냈을 터, 부디 영혼과 몸의 조율 그리고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데 정성을 쏟으시기를. 지칠 줄 모르던 성실의 인간, 예수조차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고 할 때가 있었다.

‘지난겨울’ 이래 태극기가 남의 물건처럼 낯설고 서먹서먹해졌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성의가 충만한 이때, 이런 마음가짐을 그냥 놔둘 수가 없어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1919~2012)이 남긴 태극기에 관한 해석을 읽게 되었다.

태극기 한가운데에 영, 하나, 둘이 있고 그 바깥에 셋, 넷, 다섯, 여섯이 둘러서 있다. 무슨 말일까? 동그라미는 무극이라 영(0)이고, 원 중심은 태극이니 하나(1)다. 그리고 음양이 둘(2)이다. 영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하나는 진리, 음과 양 사이를 지나는 에스 자는 생명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셋(☰)은 하늘 천(天), 넷(☲)은 불 화(火), 다섯(☵)은 물 수(水), 여섯(☷)은 따 지(地)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천지수화는 각각 세 개(天), 네 개(火), 다섯 개(水), 여섯 개(地)의 길거나 짧은 금들로부터 나온 글자임을 알 수 있다. 건곤감리의 3, 4, 5, 6에는 춘하추동이 들어 있다. 땅은 봄, 불은 여름, 하늘은 가을, 물은 겨울을 나타낸다. 땅이 녹는 때가 봄이고, 불처럼 뜨거울 때가 여름, 하늘이 가장 높을 때는 가을, 물이 얼어붙는 때가 겨울이라서 그렇다.

3, 4, 5, 6을 공간적으로 보면 천지수화, 시간적으로 보면 춘하추동인데 이를 인간의 성품으로 따질 때는 인의예지가 된다. 봄은 따뜻하니까 사랑의 인이고, 가을은 서늘하니까 정의의 의, 여름에는 온갖 풀이 무성해져서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기니까 예, 겨울은 차갑고 냉정하니까 이지의 지이다.

영은 무극, 하나는 태극, 둘은 음양, 셋은 하늘, 넷은 불, 다섯은 물, 여섯은 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셋, 넷, 다섯, 여섯은 더하거나 곱하기를 해보면 언제나 더한 것이 작고, 곱한 것이 크다.

예를 들어 셋하고 셋을, 합하면 여섯 곱하면 아홉이다. 하지만 영, 하나, 둘의 경우는 다르다. 곱한다고 해서 반드시 커지지 않는다. 영에다 영을 더해도 영, 영에다 영을 곱해도 영이다.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 곱하면 도로 하나다. 둘에 둘을 더 해도 넷, 둘에 둘을 곱해도 똑같이 넷이다. 삼사오륙과 달리 무극, 태극, 음양은 규칙 밖이다.

옛 사람들은 사람의 짐작이 미치는 과학 세계를 형이하(形而下), 이성 그 이상의 영성 세계를 형이상(形而上)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체(體)로 보고, 드러난 세계를 그것의 용(用)이라 여겼다. 무극/태극/음양을 가운데에 두고 천/지/수/화를 둘레에 배치함으로써 안팎을 나눈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사람은 ‘안’과 ‘밖’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 안은 들여다볼 수 없지만 밖은 훤히 드러난다. 흔히 여기서 속는다. 보이는 것이 아무리 화려해도 속에 묻힌 것이야말로 나의 뿌리이며 실상이다. 사람이 돌아갈 고향도, 반드시 찾아내야 할 영원한 보물도 거기에 있다.

영, 하나, 둘이 없으면 셋, 넷이 나올 수 없다. 셋, 넷이 나오려면 영, 하나, 둘이 먼저 있어야 한다. 하나하고 둘이 합해야 셋이 되지 거저 셋이 나올 순 없다. 뿌리가 있어서 잎이 나고 꽃이 핀다.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있기는 있다.

있기는 있는데 알 수는 없는 것을 서양에서는 ‘존재’라 했고, 우리 옛 어른들은 ‘도’라고 불렀다. 분명 있는데 알 수는 없는, 그래서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래도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있음을 믿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통찰이 흐려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변변한 이름도 없는 주제에 무슨 대수냐고 무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산천초목을 함부로 망치는 것도, “그냥 밥하는 아줌마” 아니냐며 깔보는 것도, 밤낮으로 저를 위해 수고하는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일삼는 것도 다름 아닌 0, 1, 2, 3, 4, 5, 6을 셀 줄 모르는 바보 천치라서 그렇다.

궂은 일하는 사람들의 고마움은 하나도 모르면서 펄럭이는 국기에 대해서만큼은 깍듯이 경의를 갖추던 자들이 지난날 너무나 흔했고, 아직도 지천이다. 눈앞의 것만을 전부요 최고로 여기는 오늘의 졸렬함을 부끄럽게 통회하고, 말할 수 없이 높고 깊고 넓었던 옛 사람들의 안목을 되찾자는 게 아니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남을 위함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그 큰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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