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한 것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정의당이 차별금지법 제정에 나섰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입법으로 처음 발의돼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됐다. 20개의 차별금지조항이 담겼으나 입법 과정에서 7개 항목이 삭제됐다. 삭제된 조항 중 ‘병력’ ‘학력’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의 경우 한국경영자총연합회를 비롯한 재계에서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막는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특히 종교계의 반대가 심했다. 삭제되지 않은 13개 영역은 성별, 장애, 나이,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사회적 신분 등이다. 차별금지법은 19대 때에도 발의됐으나 입법 절차에 오르지 못했고, 20대 때는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왜 필요할까.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 존재한다”고 돼 있다. 1948년 제정돼 국제관습법의 지위를 획득한 세계인권선언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헌법 제11조 1항도 평등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법률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고 법률 제정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다.

차별의 존재 여부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욕’이다. 욕설은 차별을 넘어 혐오를 표현하는 말이다. 따라서 욕설에 등장하는 대상은 거의 대부분 그 사회에서 심각한 차별을 받는 존재들이다. 우리말에서 자주 사용되는 욕설은 여성, 성기 및 성행위, 장애인, 이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성기 및 성행위는 남성을 대상으로 했을 때 대부분 지시나 강조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면 여성의 경우 비하, 폄훼, 모욕의 효과가 크다. 따라서 욕설을 통해 절대적으로 차별받아온 대상은 여성과 장애인, 둘로 요약할 수 있다.

여성에 관한 욕설은 매우 폭넓은 데다 성기나 성관계를 지칭하는 좋지 않은 어감의 말과 결합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똑같은 사회활동이라도 여성형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공돌이보다는 공순이가 널리 사용됐고 똑같이 바람을 피워도 자유부인은 있는 반면 자유남편은 없다. 여성에 관한 욕설이 외모, 행동거지, 직업 등 여러 영역에서 변주를 보였다면 장애인의 경우 여성에 비해 수는 많지 않지만 거의 모든 장애 유형이 욕으로 사용돼 왔다. 바보, 병신, 저능아, 불구자, 앉은뱅이, 난쟁이, 봉사 등 정신장애와 지체장애는 물론 사회활동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작은 차이조차도 욕으로 쓰인다. 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회 각 부문에서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발생하며 장애인은 존재 자체가 차별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나머지 항목도 여성이나 장애인만큼은 아니지만 관련 욕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나이’의 경우 ‘새끼’가 대표적이다. ‘출신지역’도 경상도나 전라도 등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비하 단어가 존재하며 ‘사상’과 관련해서도 ‘빨갱이’ 같은 말이 있다.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면서 이들을 비하하는 표현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대응하는 욕설을 찾아보기 어려운 항목도 있다. 위의 삭제 항목 중 ‘범죄 전력’이나 ‘병력’, ‘학력’과 관련된 경우다. ‘전과자’나 ‘미필’, ‘중졸’ 또는 ‘고졸’ 같은 단어에 대응해 통용되는 비칭은 없다. 이들의 경우 혐오에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차별은 존재한다는 얘기다. ‘성적 지향’은 또 다르다.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일컫는 모든 단어가 특별한 변주 없이 그 자체가 욕설로 사용되고 있다. 장애 관련 단어처럼 순화된 말도 없다. 장애인처럼 존재 자체가 차별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장애인과 달리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언어에는 사회구조가 반영돼 있다. 욕설도 마찬가지다. 그 사회의 소수자가 욕설의 대상이 된다. 거꾸로 차별금지법의 제정 실패도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2007년 항목 삭제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재계와 보수 기독교계다. 이 두 집단은 실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권력집단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집단으로 볼 수 있다. 올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내용상 실패는 그래서 더욱 애석하다. 차별금지법처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법률의 제정에는 유권자 눈치를 보지 않는 군소 비례정당이 나서줘야 하기 때문이다. 정의당이 포문을 열었지만 발의를 위해서만도 4석이 더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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