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후보와 국가보안법

최근 이흥구 판사가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제청되면서 일부에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과거 국가보안법(보안법)으로 구속된 전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안법은 과연 어떤 법일까? 한마디로 ‘애국자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상호적인 동시에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법으로 강제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음은 2018년 초 국내에서도 개봉된 미국 영화 <당신은 나라를 사랑하는가(The Oath)>의 줄거리로 강요된 애국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임미리 고려대 연구교수·정치학 박사

영화에서는 미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애국자 서약’을 하라고 요구하며 세금 공제 혜택을 주겠다고 한다. 서약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은 없다고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서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국가기관이 감시하고 억압하는 한편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되는 사람도 생겨난다. 나라 전체가 둘로 나뉘어 싸우게 되고 결국 사회를 분열시킨 책임으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법안도 함께 폐지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미국의 역사적 경험 때문인 것 같다. 미국에서는 2001년 9·11테러 직후 일명 ‘애국자법(Patriot Act)’으로 알려진 ‘테러대책법(Anti-terrorism legislation)’이 제정됐지만 2016년 폐지됐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치안유지법을 바탕으로 해 1948년 말 제정된 보안법이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대법관 후보는 영화로 치면 애국자 서약을 거부한 경우에 해당한다. 영화 속 미국이라면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제도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환호와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낡은 법의 굴레 속에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보안법 폐지를 위한 열망이 이어졌지만 그나마 성과를 본 것은 1991년 개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와 불고지죄의 성립범위’를 제한한 것 정도다. 노무현 정부 때는 4대 개혁입법의 하나로 보안법 폐지를 추진했으나 한나라당 및 보수언론의 강력한 반발과 여론의 악화로 일부 개정으로 선회하였다가 당내 강경파와 민주노동당의 반대로 개정조차 하지 못하고 말았다. 더욱이 몇 년 전에는 ‘제2의 국가보안법’이라고 불린 테러방지법도 뒤늦게 제정됐다. 이 법은 2001년부터 꾸준히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가 2016년 초 192시간의 필리버스터 끝에 수정안이 가결됐다.

여당 의석이 176석이다. 위성비례정당을 만들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면서까지 얻어낸 의석이다. 책임이 더욱 막중하다. 맘먹고 추진하면 못할 일도 없는 의석수지만 반드시 맘을 먹고 추진해야 할 일도 있다. 최근 임대차법과 부동산 관련법이 미래통합당 등의 불참 속에 처리됐다. 야당 일부에서는 이를 놓고 절차를 무시한 군사작전 같았다고 비난했다. 그 같은 비난이 정당한지 여부를 떠나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보안법 폐지다.

여야 합의로 보안법이 폐지되는 일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보안법은 적과 동지를 가르는 법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대자를 억압하고 처벌하기 위해 제정되고 운용돼온 법이다. 보안법을 기준으로 해서는 애국이란 미명 아래 반대를 금지해온 세력과 이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만 있다. 정치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면 그러한 구분을 위해 만든 것이 보안법인 셈이다. 보안법이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과 비교해 힘의 역학관계가 바뀐 지금, 힘으로라도 이 법을 폐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방금 국회에 상정된 국가보안법은 광범하게 정치범 내지 사상범을 만들어낼 성질의 법안인 점에서 우리는 단호히 반대한다. (…) 대한민국의 존립과 그 발전을 해하려고 하는 모든 수단에 대한 방비를 위한 것이라고 입법의 동기가 설명되고 있으나 (…) 이러한 법의 제정은 대한민국의 전도를 위하여서나 우리 국민의 정치적, 사상적 교양과 그 자주적 훈련을 위하야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을 국회제공에게 경고코저 한다.”

인용문은 보안법이 국회에 처음 상정됐던 1948년 11월14일 조선일보 사설의 일부다. 보수언론이 초심으로 돌아간다면 전 국민적 합의에 의한 폐지도 가능하겠지만 난망하다. 여당은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사는 보안법에 대한 저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현 여당의 민주적 정통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에야말로 눈치 보지 말고 폐지를 강행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에 대한 불필요한 색깔논쟁도 불가역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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