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깔세’ 매장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신도시 상가 건물에는 무엇이 들어오나 궁금해서 종종 간판 구경을 위해 나서곤 한다. 컨테이너 박스에 차려진 부동산중개소들은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이 상가에는 병원과 약국,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들어설 예정이라면서 설레발을 치며 투자를 권유하곤 한다. 지금 집에서 쓰고 있는 행주가 다 이런 ‘컨테이너 부동산’에서 얻어온 것들이다. 하지만 막상 그 건물엔 들어오기로 했다는 유명 커피점이 아니라 저가 테이크아웃 커피점이나 한철 뜨다 지고 말 복고풍 고깃집들이 자리를 잡곤 한다. 결국 병원이나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점 임차인을 들이고 싶은 것은 건물주의 ‘빅피처’이자 ‘로망’일 뿐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구도심’이 되어버렸다. 아파트 이름이 촌스러워 부동산 가치가 떨어진다며 발음도 어렵고 뜻은 더 모르는 라틴어풍 이름으로의 개명을 추진 중이다. 또 최신 브랜드 아파트의 상징인 문주를 세우겠다며 5000원씩 집주인들에게 징수 중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가치 하락을 겪고 있는 데는 아파트 상가다. 중심상가 1층 100평대 임차비가 거의 월 1000만원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체 빵을 몇 개나 팔아야 저 가겟세를 감당할까 싶어 대기업 빵집 걱정을 할 정도였다. 이런 동네에 ‘깔세’ 매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깔세’란 단기 임대차, 즉 보증금이나 권리금 없이 시세보다 높은 월세를 한두 달치 미리 내고 주택이나 상가를 임차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세를 미리 깔고 시작한다는 뜻의 부동산 은어다. 선거 사무실을 빌릴 때도 이런 깔세가 활용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공장 부도’ ‘폐업 정리’ ‘눈물의 고별전’ ‘땡처리’ 같은 현수막을 걸고 등산복이나 속옷, 양말, 화장품, 치약이나 비누 같은 생필품을 인도까지 쭉 늘어놓고 파는 그런 매장이다. 짧게는 일주일, 길어봤자 두세 달 정도 반짝 영업을 하고 사라진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이런 가게는 주로 현금을 선호하지만 요즘은 빌린 신용카드 단말기를 사용하면서 ‘신용카드 환영’이란 문구도 붙이곤 한다. 카드 영수증에 뜨는 사업자 등록지가 엉뚱한 이유이다.

깔세만 전문으로 운영하는 소위 ‘깔세자리부장’도 있다. 여러 깔세 매장을 동시에 운영하면서 ‘일세’라 하여 매일매일 일수를 걷듯 깔세 매장 상인에게 받아 간다. 깔세도 상권에 따라 그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자리부장들은 심지어 장사 품목도 제안해준다. 폐업 처리만 전담하는 업체들이 쟁여둔 ‘땡처리’ ‘왕도매’ 물건을 떼다 깔세 매장에서 팔도록 주선해준다.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어려운 시대에 결국 장사나 해볼까? 하는 이들에게 깔세 매장은 강력한 유혹이다. 창업비 중에서 큰 부담인 보증금 마련을 하지 않고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직적인 깔세업자들도 있어 폐점하는 대형 쇼핑몰에 단체로 입점해 이벤트처럼 치고 빠지는 경우도 많다. 당연히 물목이 겹치는 상점에 큰 타격을 준다. 노점상은 단속반이라도 뜨지, 깔세 매장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더욱 고약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깔세 매장은 기존 상권과 많은 충돌이 나지만 건물주들이야 뭘 팔든 임대료만 잘 걷으면 그뿐이다.

수많은 상가에 ‘임대문의’ 현수막이 걸린 지 오래다. ‘내부수리 중’이라는 메모지가 붙어 있지만 공사의 흔적도 없고, 공과금 계고장이 문틈 사이에 끼워져 있을 뿐이다. 날렵한 솜씨로 문틈 사이에 꽂은 사채업체 명함만 가득 쌓여 있다. 불황의 대표적 현상인 깔세 매장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 위험 징후다.

추석연휴 전날인 9월29일 여야 합의로 코로나19로 고통에 빠진 소상공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공포되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소상공인들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게의 문패를 떼고 번지 없이 떠돌고 있다. 늦었다 했을 때는 정말 늦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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