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의 녹색불, 모자란 적 있나요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영화 <그린북>은 미국의 인종차별을 그려낸다. 주인공 셜리는 백악관에도 초청받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지만 미국 남부 공연 도중 동네 술집에 갔다가 ‘깜둥이’라는 이유로 얻어터지고, ‘유색인종’이 머무를 수 있는 숙소 바깥으로는 나갈 자유조차 없다. 영화의 배경이 케네디 대통령 시절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차별의 본질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주어진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더라도 쉬이 얻을 수 없는 권리라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 시대와 닮은 점이 있다.

전화를 받았다.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교제 중인 애인은 한쪽 다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걷거나 천천히 뛰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8차선 횡단보도 가운데에서 전화를 한 것이다. 신호는 너무 빨리 줄어들고, 차들은 자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럴 때면 생각처럼 다리가 빨리 움직여지지 않아 무섭다고 했다.

박진웅 편의점 및 IT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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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등의 신호가 모자란 적이 없다. 신호가 얼마 안 남았으면 뛰면 그만이다. 설령 빨간불로 바뀌더라도 몇 초 정도는 차가 기다리니까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울음 섞인 목소리에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진정으로 그 상황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녀의 걸음 속도라면 신호등 신호 시간이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유심히 사람들을 지켜보곤 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신호 시간 내에 횡단보도를 못 건너는 경우가 많았다. 유모차를 끄는 부인, 걸음이 느린 노인, 리어카나 짐수레를 끄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까지.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훌쩍 다 건너고 신호가 끝나가는 동안에도 횡단보도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곤 했다.

어느 날, 신호가 끝난 길을 마저 건너는 노인 앞에서 차의 경적소리가 크게 울렸다. 노인은 흠칫 놀란 듯했지만 걸음이 그보다 더 빨라지기는 어려웠다. 겨우 횡단보도를 다 건넌 노인은 숨쉬기가 힘드셨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서서 숨을 고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신호가 다시 바뀌었을 때, 나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지나가고, 신호가 거의 끝나가는 동안에도 내게는 아직 두 차선이나 남아 있었다. 조금 무섭기 시작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의 부릉거림이 마치 화가 난 소의 울음소리 같았다. 차들이 슬슬 앞으로 나오며 안전선을 넘어 횡단보도의 절반을 밟을 때 나는 겨우 인도로 돌아왔다. 그녀가 느낀 무서움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충분한 선택지가 있었다. 걷는 속도를 올리는 것도, 뛰어가는 것도, 심지어 노란불에 차를 들이미는 운전자에게 화를 내는 것도. 그러나 나에게 당연한 이런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보행약자’라는 말을 찾아봤고, 차선이 많은 곳에서 횡단보도 신호가 생각보다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큰길을 건널 때는 가까운 중앙버스차로 정거장에서 한 번 쉬어가기 위해 빙 돌아간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에게 힘내라고, 건널 수 있다고 쉽게 했던 말들이 미안했다.

보행약자들을 위해 보행신호등의 녹색 불을 몇 초 늘리는 것은 많은 운전자에게 불편일 수 있다. 어쩌면 출근길 교통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을 건너는 일 정도는 모두에게 안전하고 여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져야 할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애인은 그 뒤로 버스정류장 쪽으로 돌아서 길을 건너고 있다. 중간에 쉴 수 있다는 점이 조금 안심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가 생길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큰길을 건너보곤 한다. 이런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 그녀가 해야 하는 노력이라면, 약간의 기다림으로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은 우리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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