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

오은 시인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이 비가 그치면 뭐라도 달라질 것 같았다. 하다못해 계절이라도. 주말에 이불 빨래를 하려고 벼르던 참이었는데, 별수 없이 다음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깨끗하게 포기했으면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얄궂게도 얼마 전 동네에 문을 연 코인 빨래방이 떠오르고 말았다. 빨래방이 문을 연 날, 운동화 세탁을 하려고 호기롭게 카드를 충전했었다. 운동화 세탁 및 건조는 현금으로만 가능하다고 해서 아쉽지만 카드는 지갑 속에 고이 넣어두었었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지갑을 열어보지 않아야 했다. 다음주까지 카드가 있는지 확인하지 말아야 했다. 무심코 들여다본 지갑 속에는 카드가 없었다. 선택의 기로가 연이어 나타났다. 이불 빨래를 하느냐 마느냐, 코인 빨래방에 가느냐 마느냐, 충전 카드를 찾느냐 마느냐… 책상 위 잡동사니 더미에도, 수첩이나 메모지를 넣어두는 서랍 속에도 카드는 없었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카드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나를 놀리는 듯했다. 거기서 그만두어야 했다.

두 시간여의 난리법석 끝에 명함을 보관하는 상자 속에서 충전 카드를 발견했다. 정작 카드에 얼마를 충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카드를 찾은 이상 빨래방에 가야 했다. 우산을 쓴 채 이불 두 채를 안고 낑낑거리며 빨래방에 들어섰다. 20㎏ 대형 세탁기 두 대와 28㎏ 초대형 세탁기 두 대가 모두 돌아가고 있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세탁 시간이 15분인 세탁기가 보였다. 조금 기다렸다가 저 세탁기로 이불 빨래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세탁이 끝났는데도 세탁물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탁물을 빼서 선반 위에 올려놓을 용기 또한 없었다.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집에 가서 노트북을 가지고 나왔다. 그사이 주인이 빨래를 찾아간 모양이다. 쾌재를 부르며 이불을 넣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세탁 후 카드의 잔액은 4000원이었다. 세탁기는 규칙적인 속도로 돌아가고 생활 소음은 집중하는 데 은근한 도움을 주었다. 그사이 일주일치 빨래를 가지고 온 사람, 묵은 여름옷을 손수레에 챙겨온 사람, 운동화 여섯 켤레를 건조한 뒤 가져가는 사람을 보았다. 나처럼 충동적으로 방문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휴일의 빨래가 루틴이었다.

세탁을 마치고 축축한 이불을 꺼내 대형 건조기에 넣었다. 4분에 500원이니 32분을 건조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부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능숙하게 코인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아이도 익숙한 듯 창가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꺼냈다. “아까 보았던 비 맞은 장미를 그릴 거야.” 아이는 18색 크레파스를 꺼내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빨간색 안 써?” 아빠가 눈을 홉뜨며 물었다. “장미는 빨갛기만 한 게 아니잖아.” 야무지게 대답한 아이는 빨간색과 갈색, 그리고 보라색 크레파스를 꺼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스트레스를 받던 내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언젠가부터 나는 선택하지 않은 쪽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내가 고르지 않은 떡이 남의 떡이 되는 상황에서, 남의 떡이 번번이 더 커 보였던 것이다. 18색 크레파스만 가지고도 그 안에서 색을 배합하는 아이를 보니 선택의 가짓수보다 선택의 여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에 앞서 자주 망설이고 종종 좌절하는 어른보다 선택에 기꺼이 골몰하는 아이가 만족감이 클 것은 자명하다.

잠시 후, 건조가 종료되었다는 신호가 울린다. 이불을 만져보니 아직 완벽하게 건조되지 않았다. 4분만 더 건조하면 뽀송뽀송하게 마를 것 같다. 충전을 하느냐 마느냐,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이 하나도 없다. 집에 다녀오느냐 마느냐, 비 오는 소리에 맞춰 선택의 기로가 뿌리처럼 뻗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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