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과잉과 ‘헬조선’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루크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얼마 전 지인에게 안부 문자 후 답장을 받았다. “단군 이래 가장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다들 ‘헬조선’이라고 불평이네요!” 헬조선! 이미 철 지난 표현 아닌가 싶었는데, 이 문자 이후 다시 생각해 봤다. 왜 헬조선일까?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루크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강명구 뉴욕시립대 바루크칼리지 정치경제학 종신교수

저마다 각양의 이유가 있겠지만, ‘헬조선’이라 느끼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어쩌면 유독 강한 교육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을 나와도 전혀 엘리트로 대접받지 못하는 그 주관적 기대치와 객관적 현실 사이의 높은 괴리감 말이다. 그래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소위 명문대학이라고 하는 서울대, 연·고대와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미국 동부의 8개 명문 사립대학들은 각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지난해 가을 기준, 미국대학에 등록된 학생 수는 2000만명 정도 된다. 이 중 학부생은 1700만명에 육박하고, 대학원생의 숫자는 310만명을 넘는다. 미국 인구의 6% 정도가 대학생이란 얘기다.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다. 그렇다면 이 중에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학부생은 몇 명이나 될까? 작년도 등록학생 수는 약 6만8000명이다. 생각보다 훨씬 적다. 미국대학 학부생 전체의 0.4%로, 학생 1000명 중 겨우 4명 정도라는 의미이니 분명 소수는 소수다. 희소성이 곧 명예와 권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서울대, 연·고대의 학부생 숫자(분교 포함)를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6만8000여명으로 아이비리그 8개 대학 재학생 수와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이들 3개 대학이 한국 대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2020년 교육부 발표 교육통계를 찾아 보니, 일반대학 191개교와 교육대학 10개교, 전문대학 등을 포함해서 학부 재학생 수는 약 215만명이다. 이들 3개 대학 재학생의 비중은 전체의 3.2%다. 총 144만여명인 4년제 일반대학 재학생 수만 놓고 보면 비율이 좀 더 올라간다. 거의 100명 중 5명이 이 3개 대학에 재학 중이다. 단순 비율상으로만 보면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미국 대학 내 비중에 비해 최소 8배 이상 높다. 동문 숫자는 얼마나 되나 검색해 보니 이들 3개 대학 동문 숫자 총합은 최소 100만명을 훌쩍 넘는다. 고개가 갸우뚱해질 정도로 많다. 희소성보다는 세력과 규모에 치중해 온 것 아닌가 싶은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이 정도까지 파악하고 나니 진화인류학자인 피터 터친의 ‘엘리트 과잉생산 가설’이 떠오른다. 그가 보기에 미국 사회가 극우와 극좌의 이념지형으로 점점 더 양극화되고 정치불안정성이 증가하는 핵심 이유는 엘리트가 과잉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예로 드는 엘리트 과잉생산의 지표 중 하나는 변호사 수다. 한국은 변호사 수가 3만명을 넘어섰다고 관련업계에서 난리지만 미국의 변호사 수는 133만명이나 된다. 매년 로스쿨에서 쏟아져 나오는 졸업생도 3만명 정도다. 인구 대비로 따져 보니 한국의 약 6.5배다. 많긴 많다. 그래서 탈도 많고, 말도 많다. 문제는 이들 로스쿨 졸업생 중 많은 수는 정치엘리트가 되겠다는 야망과 꿈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국의 상원의석 수는 1959년 이후 줄곧 100석이고, 하원의석 수도 1913년의 435석에서 큰 변화가 없다. 아무리 기를 써도 권력의 정점에 이르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또한 한번 당선되면 30~40년간 의원을 지속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이 경쟁에서 탈락한 수많은 엘리트들, 대다수는 로스쿨 등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좌절된 분노를 세상에 쏟아내며 점점 더 극단적인 정치적 주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증적 타당성을 떠나 곱씹어 볼 만한 주장이다. 사실 소수의 대표자를 뽑아 권한을 위임해서 운영되는 조직에서는, 20세기 초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주장했듯, 필연적으로 과두제적 지배 현상이 발생한다. 기업이나 노조, 정당, 협회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결국 문제는 과두제적 지배 자체가 아니라, 한정된 권력을 차지한 소수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느냐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점점 더 폐쇄적이고 경직적으로 조직이나 사회를 운영하면 쇠락과 퇴보는 필연이다. 역사의 수많은 흥망성쇠 사례들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한국은 1960년대 초반 이후 쉼없이 매진해왔고 새로운 전환이 필요한 역사의 변곡점에 처해 있다. 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다음 세대 30년을 위해 엘리트 육성과 충원 과정이 더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바뀔 수 있도록 서로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다원적인 민주권력은 저절로 수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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