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번진 잉크 얼룩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소시지를 먹은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도대체 누가, 왜 소시지에 독을 넣은 것일까?

1802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시는 ‘선지로 만든 훈제 소시지’에 관한 위험주의보를 발령했다. 시야가 흐려지고, 눈꺼풀이 내려가며, 말이 느려졌다. 점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죽었다.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다. 하지만 독일인의 소시지 사랑은 여전했다. ‘소시지 중독’ 환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소시지를 먹고 죽었으니, 정육점 주인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케르너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시인이자 의사였던 케르너는 환자 76명을 조사해서 질병의 양태를 정리했다. 그리고 파리와 메뚜기, 개구리, 토끼 등을 잡아서 소시지 추출물을 투여해보았다.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심지어 자기 혀에도 몇 방울 떨어트려 보았다. 아니, 혀가 마비되는 것이 아닌가?

라틴어로 소시지나 순대를 보툴루스(botulus)라고 한다. 그래서 케르너는 이 병을 보툴리즘이라고 명명했다. 만약 케르너가 한국인이었다면, 순대병라고 이름 붙였을까? 보톡스가 바로 클로스트리듐 보툴리눔이라는 세균의 독소다. 마비 효과를 이용하여, 아주 적은 용량으로 주름을 펴는 것이다.

일부러 독을 넣은 악당은 없었다. 진짜 범인은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 연구 덕분에 케르너는 ‘부어스트-케르너’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애꿎은 소시지 장인이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케르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노인이 된 케르너. 실수로 종이에 잉크를 흘렸다. 구겨진 종이를 다시 펴보니, 어라? 재미있는 그림이 보였다. 그는 일부러 잉크를 떨어트리고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이런저런 얼룩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사람도 보이고, 동물도 보이고, 집도 보였다. 이런 작화 기법을 클렉소그래피(klecksography)로 이름 짓고 시집의 삽화를 그릴 때 사용했다.

우연히 찍힌 잉크 반점이 왜 사람이나 사물 혹은 어떤 숨겨진 의미를 가진 계시로 느껴질까? 아포페니아(apophenia)라 불리는 심리 현상이다. 불에 구운 거북 껍데기의 균열로 흥망을 점치며, 상 위에 흩뿌린 쌀알로 길흉을 따지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원래 자연현상에는 어떤 의도도, 어떤 의미도 없다. 인간이 제멋대로 갖다 붙이는 것이다. 인류의 본성이다. 좋게 말하면 위대한 창조성, 나쁘게 말하면 망상적 편집증이다.

아무튼 클렉소그래피는 제법 인기를 얻었다. 스위스에 살던 한 소년, 헤르만 로르샤흐도 그림에 푹 빠졌다. 심지어 친구들은 그에게 ‘클렉스’, 즉 잉크 얼룩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소년은 미술과 과학에 모두 재능이 있었는데, 대학 진학을 앞두고 큰 고민에 빠졌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는 미술을, 저명한 생물학자였던 에른스트 헤켈은 과학을 권유했다. 로르샤흐는 헤켈의 조언을 받아들여, 1906년 취리히 의대에 입학했다.

정신과 의사가 된 로르샤흐는 여전히 클렉소그래피를 사랑했다. 같은 모양의 반점을 보여주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보았다. 중요한 것은 반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각자의 마음이었다. 그는 잉크 얼룩으로 인간의 무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0년이 넘도록 로르샤흐 검사는 신뢰받는 심리 검사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앞날이 창창한 의대생이 한강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안타까운 마음은 모두 하나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의견은 각자 다르다. 전 국민이 탐정이다. 모두 나름대로 추리를 펼치고 있다.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으로 단정하며, 벌써 여론을 통한 단죄에 나선 이도 있다. 그러나 소시지 중독 사건의 범인은 정육점 주인이 아니었다. 잉크 얼룩에 관한 각자의 생각은 그 자체로 솔직한 것이지만, 분명 진실은 아니다. 그건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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