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 ‘책고집’ 대표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켄 로치 감독의 동명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빵과 장미’라는 구호는 현대 노동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다.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일어난 파업에서 처음 등장한 이 구호는 노동자들에게 기본 생존권(빵)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엄을 누릴 권리(장미)도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오늘날까지 널리 쓰이는 이 구호는 ‘세계 여성의날’(3월8일)의 제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최준영 ‘책고집’ 대표

최준영 ‘책고집’ 대표

1995년 뉴욕 주변의 노숙인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클레멘트 코스)를 꾸렸던 얼 쇼리스 역시 ‘빵과 장미’의 상징성에 주목했다. 생존권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누릴 권리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숙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얼 쇼리스는 장미 대신 책을 외쳤다. 아무려나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양대 축으로서 ‘빵과 장미(혹은 책)’는 상보적으로 작동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선 빵이 대세를 이룬 듯하다. 도심을 벗어난, 경치 좋고 접근성 뛰어난 곳에는 어김없이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선다. 한때는 모텔 신축이 한창이더니, 언젠가부터 카페가 주를 이루었다. 입지와 브랜드 경쟁을 거듭하던 카페업계는 마침내 베이커리 카페라는 규모전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어딘가에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섰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고 입소문을 탄 카페는 어김없이 문전성시다.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따금 가게 되는데, 갈 때마다 충격을 받는다. 일테면 문화적 충격이다. 일단 어마어마한 매장 규모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궁궐 같은 웅장함이 있는가 하면 감각적 디자인이 돋보이는 신축 건물을 통째로 활용한 곳도 있다. 응당 사람이 모일 만하고, 몰려드는 인파에 한 번 더 놀란다.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시기 위해 족히 반 시간을 기꺼이 줄 서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저마다의 표정은 즐거워 보인다. 서넛이 둘러앉아 커피와 빵을 놓고 여가를 즐기는 것, 코로나 시대에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사치이자 ‘소확행’이 아닐런가 싶다.

3년 전 ‘핫플레이스’로 급부상한 수원 성곽길에 북카페(책고집)를 냈다. 어찌 된 일인가. 나날이 찾는 이가 준다. 코로나 이후론 거의 개점휴업이다. 코로나만 핑계할 순 없다. 근본적으로 의문을 갖게 된다. ‘여전히 책은 사람을 유인하는 매력을 가진 그 무엇이긴 한 건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책은 더 이상 모두가 즐기는 애호품이 아니다. 하물며 북카페라는 개념은 현실과 동떨어진 발상이다. 경제원리에도 역행한다. 사람 드나드는 업장의 생명은 고객 순환율이다. 책은 원활한 순환을 방해한다.

오랜만에 책 한 권 냈다고 여기저기 메시지를 보냈다. 딴엔 적극적인 저자 마케팅이다. 반가워하며 격려를 잊지 않는 이도 있지만, 불현듯 날아든 소식에 적이 당황하는 이도 있다. 심지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이도 있다. 어떨 땐 평소 연락 좀 하며 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어떤 반응에는 그와 연락을 끊게 되었던 이유가 다시 떠올라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까짓, 책이 뭐라고.

책 한 권 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살짝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한다. 책 한 권 사달라는 ‘부탁’(‘읍소’라고 썼다가 고쳤다)을.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리 알리고, 그리 부탁해야 몇 권 더 팔린다. 연락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만, 그중 실제로 책을 사는 이는 드물다. 평소 책을 사지 않는 삶이었던 거다. 인터넷서점에는 회원 가입이 안 돼 있고, 일반 서점에는 갈 시간이 없다.

책은 평소 사는 사람이 또 산다. 집 안에 넘쳐나는 화초를 처치 곤란해하는 사람이 또 화초를 산다. 읽지 않은 책을 산더미로 쌓아놓은 사람이 또 책을 산다. 20세기의 노동운동 성과를 뒤로하고, 21세기의 지금 여기선 다시 책보다 빵에 이끌리는 삶으로 회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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