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전환 기술로서의 여행

조운찬 논설위원

도시산책자. 이한호씨는 서울 남산골한옥마을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문화기획사의 대표다. 그러나 사는 곳은 본사가 있는 서울도, 고향인 부산도 아닌 광주다. 광주 구도심인 양림동에서 9년째 산다. 광주비엔날레 연출, 대인시장 브랜드 개발 등 지역문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광주에 눈떴다. 광주를 자주 찾으면서 기획자가 아닌 여행자의 시선으로 지역을 보기 시작했다. 2012년 어느 날 양림동을 어슬렁거리다 서양 선교사들의 묘역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서 ‘5·18 이전’ 광주의 역사를 발견했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역사문화도시 재생에 뛰어들었다. 10년간 광주를 산책한 그는 문화공간 ‘10년 후 그라운드’를 차리고 또 다른 도시를 꿈꾼다. 올봄에는 제1회 양림골목비엔날레를 열었다.

조운찬 논설위원

조운찬 논설위원

청년의 벗. 홍동우씨는 사회에 진출하면서 20~30대 대상 전국일주 여행업체를 차렸다. 여행사 대표였지만, 그가 한 일은 여행자를 위해 운전하고 요리하고 모닥불을 피우는 게 전부였다. 2년간 여행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관광이 아닌 이 땅 청년들의 현실이었다. 고뇌하고 지친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명소관광도 음식여행도 아닌 힐링이었다. 목포에 정착해 ‘괜찮아 마을’을 열었다. 쉬어도, 실패해도, 무엇을 해도 괜찮은 커뮤니티 마을이다. 지역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청년 일자리를 찾아주는 스타트업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찾아온 청년들에게 일주일 또는 한달살이 공동생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지난 3년간 120여명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이 중 30여명은 목포에 살며 문화기획, 출판, 마을재생, 음식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나주의 발견자. 남우진씨는 마흔 넘도록 고향을 떠나지 않았던 뼛속까지 전북 사람이다. 학교를 마치고 전주에서 기업 컨설팅 일을 하다 뒤늦게 나주와 조우했다. 100년 전만 해도 전주와 함께 호남을 대표하던 역사도시. 첫 나주여행 때 읍성 밖 향교 옆에서 무너져가는 가옥들을 보고 눈을 떼지 못했다. 전국적 명소가 된 전주 한옥마을을 벤치마킹했다. 한옥·양옥·일옥의 특성을 갖춘 목서원, 한옥 전통을 오롯이 간직한 정자 난파정을 차례로 구입해 ‘3917 마중’이라는 복합 문화공간을 만들었다. 농업회사법인, 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어 지역 청년들과 나주의 역사문화 콘텐츠 발굴에도 열심이다. 5년째 나주에 살며 인생 2막을 열고 있다. 그를 만나면 천년도시 전주와 나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세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행이다. 30~40대인 이들은 각각 여행을 통해 오래된 도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청년들을 만나고, 역사와 문화에 눈을 떴다. 서울 아닌 지역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도 공통점이다. 최근 남도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여행에 대한 생각 또한 남달랐다. 그들에게 여행은 ‘삶을 바꾸는 기술’이다. 고령화 시대 조기 퇴직이 늘면서 ‘생애전환’이 화두로 등장했지만, 삶의 전환은 은퇴 시기에만 닥치지 않는다. 생애전환은 청년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노동경제학회의 분석에 따르면 청년 취업자 10명 중 5명이 첫 직장을 1년 안에 그만두고, 4년 이상 근무한 청년은 10명 중 1명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하는 인공지능(AI), 플랫폼노동은 청년들의 불완전 고용을 가속화시키며 취업과 실업의 경계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고뇌하는 청년들에게 낯섦을 찾아떠나는 여행은 역설적으로 청년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전환’시키는 효과적인 기술이 될 수 있다.

팬데믹 시대에 여행은 불온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여행이 멈춰선 지금이 새로운 여행을 꿈꿀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코로나19 상황이 지속되면서 여행지도가 바뀌고 있다. 함께가 아니라 혼자 하는 여행, 사람 접촉을 최소화하는 언택트 여행, 명소를 찾아다니는 깃발꽂기가 아닌 한곳에 머무는 체류형 여행, 그간 몰랐거나 외면했던 지방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로컬여행, 탄소배출과 환경훼손을 최소화하며 자연의 삶에 눈을 돌리는 생태여행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행은 관광의 수단만이 아니다. 고단한 일상에 대한 보상 행위만도 아니다. 여행이 버킷리스트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현대인에게 여행은 몸속 유전자와 같은 존재다. 여행이 삶의 일부라면, 삶을 바꾸는 여행도 가능하다. 누군가에게, 특히 청년들에게 여행은 소비가 아닌 창조하는 삶의 원천일 수 있다. 자신을 지켜내는 안전망이 될 수 있다. 지금은 그러한 여행의 개념과 가치를 발견하고, 조직해야 할 때다. 광주, 목포, 나주의 청년들에게서 그 가능성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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