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벤자민 버튼이 산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엄마~ 도대체 왜 침대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는 거예요. 좀 깔끔하게 쓰시면 안 돼요? ”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던 엄마와 올해 합가를 했다. 독거노인의 삶이 걱정스러워 결정했는데, 한두 달은 많이 힘들었다. 이해 안 되는 생활방식들로 자주 부딪쳐서다. 방과 침대에 늘 온갖 물건이 늘어져 있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어느 날 “이제는 물건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어디에 둔지 기억도 잘 안 나고 금세 잊어버리니 가까운 곳에 놓아두는 거야”라며 넋두리처럼 말씀하셨다. 기억력이 점차 쇠퇴하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지 생각지 못했다.

박선화 한신대 교수

박선화 한신대 교수

얼마 전 지인의 부모님 댁을 들른 적이 있다. 지인이 집안일을 챙기는 동안 기다리며 둘러보니 약으로 가득찬 식탁 옆 벽장이 눈에 들어왔다. 병에 든 약, 상자에 든 약, 봉지에 담긴 약. 식사 때마다 약다발을 한아름 들고 나오시는 엄마가 떠올랐다. 하루하루 약이 늘어가는 노인의 삶을 생각하다 거실을 보니, 기동에 필요한 이런저런 보조 도구들로 어지럽다. 젖병과 조리도구, 육아 용품들로 도무지 정리될 틈이 없는 양육 가정들이 떠올랐다. 노인과 아이의 돌봄은 참 많이 닮았다.

아이들이 있는 집엔 욕실에 발판 겸용 목욕의자가 있다. 우리 집 욕실에도 비슷한 보조 의자가 있다. 서서 샤워하는 게 힘들다고 하셔서 놓아드렸다. 함께 외출하려면 신경 쓸 일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오래 걷는 것이 힘드니 자주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운동하자고 모시고 나가는 날은 내 운동은 포기해야 한다. 아이들이 언제 화장실에 갈지 알 수 없듯이 노인도 자주 확인해야 한다. 성인용 기저귀 시장이 고속 성장하고 있다는 해외뉴스가 더는 남의 일이 아니다.

배고프면 예민해지는 아이 같아서 식사시간과 간식거리도 신경 써야 한다. 강하고 거친 음식은 피하고 점차 순한 음식으로 내 식단도 함께 바뀌고 있다. 아이나 노인이 있는 집에 가스 차단기는 필수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아래층 할머니가 가스 잠그는 것을 깜빡하셔서 건물에 소방차가 왔었다. 놀라긴 했지만 상황을 알고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횡단보도의 위험도 그렇다. 아이보다 몸만 크지, 보폭도 시야도 좁다. 느리고 굼뜬 움직임에 짜증을 내면 안 된다.

공룡과 노래,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음악과 자연을 접할 때 가장 즐거워하신다. 얼마 전엔 꽃으로 가득한 색칠 그림책을 사드리고 예쁘게 그리는 요령을 알려드렸다. 방에서 색칠에 여념없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다. 엄마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시사에 밝은 분이셨는데, 그 또한 달라졌다. 이해력이 점차 떨어지며 질문이 많아진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예상치 못한 질문은 당황스러워도 반갑지만, 영특하던 노인의 뜻밖의 질문은 서글프다.

인생의 시작과 끝이 데칼코마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생존의 안전감, 애착과 안정을 추구하는 유소년기를 지나 이상과 자아를 추구하는 성년으로 성장하지만, 결국은 다시 영유아기의 뇌로 돌아간다.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얼마나 다르건 인간의 시작과 끝은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시간이 똑바로 흐르건 거꾸로 흐르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벤자민 버튼’의 숨은 이야기처럼.

아! 하지만 노인과 함께하는 삶이 늘 서글픈 것만은 아니다. 신체도, 사고력도, 생활력도 취약해지는 역주행의 운명. 그 대가로 신은 아름다운 선물 하나를 삶의 끄트머리에 숨겨두었다.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대할 줄 아는 마음이다. 멀리 사는 잘난 친구보다 소박한 동네 친구의 소중함을 알고, 세속의 귀천을 따지기보다 존재 그 자체에 천착하는 진정한 동심 말이다. 고통 끝에 탄생하는 진주처럼,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은 인생 속에서 재창조되는 아이의 마음이야말로 인생 궁극의 ‘보물찾기’임을 배우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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