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할아버지와 치매 지표

병원에 오기 싫어하시는 분이라 했다. 그래서 왕진을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민센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70대 남성. 집을 방문했을 때 반지하 문 앞에는 소주병이 널려 있었고, 집 안은 초파리로 가득했다. 어두침침한 조명, 쉬어서 냄새나는 누룽지, 찬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는 방바닥에 깔린 얇은 홑겹 이불. 주민센터에서는 발목의 욕창을 치료해달라 요청했지만, 욕창은 아니었다. 그저 손으로 긁어서 생긴 상처가 낫지 않고 오래 가고 있는 것일 뿐. 그리고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일 뿐.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주민센터의 사회복지사도 며칠 전 알게 된 분이라고 했다. 원래는 부인과 함께 살고 계셨는데, 역시 70대인 부인이 팔이 부러져 수술을 위해 입원하게 되면서, 이분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서 주민센터에서 나선 것이라 했다. 그러니 핵심적인 문제들은 1~2주 사이에 진행된 것이라는 얘기다. 진찰 결과 인지기능도 약간 저하되어 보였는데, 이것이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없던 문제가 갑자기 생긴 것인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예전에 치매 소견서 작성 교육을 받을 때가 생각났다. 강의를 하던 신경과 교수님이 한국 할아버지들은 치매가 늦게 발견되는 편이라 걱정된다고 했다. 그 사회의 분위기, 성별 역할 분담에 따라 치매가 일찍 혹은 늦게 발견되곤 하는 나라들이 있는데, 한국은 특히 남성들의 치매가 늦게 발견되는 나라란다. 대개 집에서 평소에 잘하던 집안일들인 요리, 빨래, 설거지, 청소할 때 조금 서투르거나 일의 순서가 이상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치매가 아닌가’ 가족들이 의심을 하게 되는데, 한국 할아버지들은 원래 집안일을 안 해서, 혈압약도 스스로 챙기지 않아서, 양말 한 짝 안 개는 분들이 많아서 치매 발견이 영 쉽지 않다. 못해서 안 하는 건지, 안 해서 안 하는 건지, 못해서 못하는 건지, 안 해서 못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IADL(도구적 일상생활 수행능력)은 치매의 정도를 평가할 때도 쓰이는데, 국제적인 평가도구이지만 나라별로 자기 상황에 맞춰서 바꿔 쓸 수밖에 없다. 성별과 문화에 따라 적용되지 않는 항목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양의 IADL에는 운전 항목이 들어가곤 하는데, 한국에서는 운전을 넣기 어렵다. 아직까지는 운전하는 고령 인구가 많지 않으니. 해석도 달라지게 되는데, 집안일하기·식사준비하기·빨래하기 같은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답이 그 자체로 ‘못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기능적으로는 할 수 있으나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할아버지들은 팁 계산이 서툴러지는 것으로 종종 치매가 확인되곤 한단다. 우리 아버지가 평생 잘해오셨던 팁 계산이 서툴러지셨어요. 팁 계산은 힘들고 복잡하다. 점심인지, 저녁인지, 집 앞 식당인지, 고급 레스토랑인지, 서비스가 어땠는지에 따라 적절하게 팁을 내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고려하여 팁을 잘 내시던 분이 계산이 잘 안 되기 시작하면 인지기능의 저하가 의심되는 것이다.

이런 지표가 필요하다. 옆에서 생활하는 가족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 은퇴 후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집 안에서의 역할이 늘어나야 한다. 밥 한 번 짓지 않고 살아온 할아버지들은 사회생활이 없어졌을 때 일상생활만으로 충분한 기능을 유지하기 힘들다. 작업치료라는 게 별 건가.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계속해 나가도록 기능을 유지시키는 것이 작업치료이니,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것이 가능하도록 밥을 짓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시장을 보는 활동들이 성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훈련되면 좋겠다. 치매가 늦게 발견되지 않도록, 특히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한국 할아버지들에게.


Today`s HOT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개전 200일, 침묵시위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