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착해야 살아남는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일본의 중추 대부분을 코리안계가 차지하고 있어 위험하다”, “(한국인은) 숨을 내쉬듯 거짓말하는 성격”. 화장품과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는 일본기업 DHC의 요시다 요시아키 회장의 말이다. DHC가 만드는 간행물과 인터넷 방송에서도 혐오 발언과 역사 왜곡이 여과 없이 쏟아졌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하수정 북유럽연구자

지난달 아사히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났다. 핀란드의 인기 캐릭터인 ‘무민’ 쪽에서 일방적으로 DHC와의 계약 중단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무민은 북유럽 숲속에 사는 트롤이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하마처럼 생겼다. 작가인 토베 얀손은 2차대전 당시 전쟁의 공포를 잊기 위해 아름다운 숲속에서 낙천적이고 평화롭게 사는 무민 가족을 그렸다. 이후 무민은 동화책과 만화, 영화로 제작돼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달 23일 DHC와 무민은 공식 홈페이지와 SNS 계정을 통해 무민 캐릭터가 그려진 DHC 핸드크림과 립밤을 한정 판매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무민의 일본 팬들이 SNS에 비판 의견을 달기 시작했다. 평화와 평등을 지향하는 무민이 재일 한국인에 대한 혐오를 일삼고 갈등과 차별을 조장하는 DHC 제품에 등장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취지였다. 신제품 출시 하루 만에 무민 측은 계약 해지를 발표했다. 무민 측은 “무민은 어떤 형태의 차별도 용인하지 않는다. 앞으로 협력사를 선택할 때 인권과 관련한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사과하고 다음날 홈페이지에서 DHC와의 협업 제품을 모두 삭제했다.

DHC 회장의 혐오 발언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 지적 하루 만에, 그것도 느긋한 일처리와 합의주의로 유명한 북유럽 업체가 계약 철회를 발표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혐오와 차별에 무관용 원칙을 보여줬다. 북유럽이 인권 문제에 민감한 것은 사실이나 더욱 분명한 것은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전 세계 대다수의 의견이고 그것이 시장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점이다.

인터넷만 보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극단적인 발언을 일삼는 이들은 목소리만 클 뿐 소수다. 별나고 비뚤어진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클릭장사를 하느라 이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퍼나르며 확성기 노릇을 해준 일부 매체 때문에 과다대표되었을 뿐 댓글 달 시간 없는 선량한 시민이 언제나 다수다.

DHC의 혐오 발언이 끊이지 않자 재해 시 DHC에서 영양제와 화장품을 공급받기로 한 일본의 21개 지자체 중 5군데가 협정을 폐기했다. 지자체장만의 판단일까? 지역주민이 요구하지 않았으면 굳이 폐기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요시다 회장은 유력 언론의 광고면을 사서 혐오 발언을 이어가려 했으나 거절당하기도 했다. 거절한 곳은 보수성향의 일본 최대 일간지 마이니치신문과 극우로 알려진 산케이신문이다. 일본 내 우파마저 혐오 발언에 선을 긋고 지면을 내주지 않았다. 그것이 보편적인 정서이고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인 동시에 시장에서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난봄, BBC의 탐사보도로 중국 정부의 신장위구르자치구 인권탄압 실상이 드러났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무역 제재를 가했다. 한 경제지 기자가 스위스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고 되레 중국과의 자유무역을 강화해 관계 진전에 공을 들이고 있다며 우리도 스위스처럼 실리외교를 펼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듣고 나니 스위스 초콜릿을 사지 말아야겠구나 싶었다. 이제는 기업뿐 아니라 국가도 브랜드 관리를 하는 시대다.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을 신장 면화 수확에 강제 동원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자 의류업체인 H&M과 스포츠용품 제조사인 나이키는 해당 지역 공급자와 거래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자 중국 내 불매운동이 확산되는가 하면, 중국 정부는 이들 브랜드 제품에 판매 부적합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 당장의 손실을 생각하면 기업 입장에서 쉽지 않은 판단이었을 테지만 장기적으로는 잘한 결정이라고 본다. 결국 세상은 크게 보면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보이콧과 바이콧, 이제 소비자운동은 불매와 적극 구매가 함께 간다. 브랜드명 말고는 별 디자인도 없는데 비싸기까지 한 파타고니아 티셔츠를 입고,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를 맞아준 진천에 “돈쭐”을 내자는 이들 덕에 진천군의 온라인 쇼핑몰인 진천몰은 주문 폭주로 한때 운영이 중단되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기업은 인간이 양심을 떼어놓고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기업도 좋든 싫든 착해야 살아남는다. DHC는 9월15일 자로 한국에서 영업을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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