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긍지를 담은 드라마

백승찬 문화부 차장

지난 3월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방송이 중단된 것은 방송가 안팎의 충격이었다. 정치적 압력, 제작진 내부 문제로 인한 조기종영은 있었지만, 시청자 항의로 드라마가 2회 만에 좌초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의 양민 학살, 명나라 접경지대의 중국풍 음식 묘사 등이 문제됐다.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용되는 것 아니냐며 항의했고, 방송사도 수백억원 들인 드라마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방송을 시작한 SBS 드라마 <홍천기>가 원작의 조선을 가상국가 배경으로 바꾼 것도 <조선구마사> 사태의 여파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백승찬 문화부 차장

수천건의 시청자 민원을 받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달 <조선구마사>에 대해 행정지도인 ‘권고’ 결정을 내렸다. 권고의 근거 중 하나로 내놓은 것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5조 3항 “방송은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은 의외로 자주 활용된다. 2월 종영한 tvN 드라마 <철인왕후>는 조선왕조실록을 희화화하는 대사가 있었다는 등의 이유로 같은 조항이 적용돼 방심위 행정지도를 받았다. 2019년 4월 연합뉴스TV가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 소식을 전하며 북한 인공기를 배경에 둔 사고를 낸 데 대한 징계에도 같은 조항이 적용됐다. 이 조항은 너무나 추상적이라 심의기관의 자의적인 판단을 허용한다는 지적이 이어져왔다. 박근혜 정부 당시 방심위가 ‘역사 왜곡 방송을 바로잡겠다’며 이 조항을 강화하려다가 무산된 것도 이 같은 비판 때문이었다.

넷플릭스 <킹덤: 아신전>에서 아신은 조선에 귀화한 여진족 성저야인이다. 조선인들이 하지 않는 천한 일을 하는 성저야인은 조선인의 멸시를 받으며 살아간다. 같은 민족인 여진족에겐 배신자, 조선에서는 하층민이다. 이중의 소수자인 아신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조선인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아신전>에는 호평과 혹평이 엇갈렸다. 혹평 중에 눈길을 끈 것은 “여진족 여자가 조선 남자들을 잔인하게 죽여서 싫다”는 반응이었다. 성저야인을 이용하는 조선인이 나쁘게 그려졌기에, 전 세계 넷플릭스 시청자가 조선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런 혹평을 내리는 이들의 마음속에는 역시 제25조 3항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가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얼마나 손상시킬 수 있을까. 아니, 한 편의 드라마로 손상될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라면 그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을까. 지금 한국 드라마는 한국인뿐 아니라 사실상 전 세계인을 잠재적인 시청층으로 전제하고 있다. 국내외 시청자들은 <태양의 후예>같이 한국 군대를 멋지게 그린 드라마도 좋아하지만, <D.P.>처럼 군대 내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담은 드라마에도 호기심을 보인다. 최근 중국 당국은 ‘사회 정화’를 하겠다며 대중문화계를 고강도로 규제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중국 사회의 그늘을 그린 드라마가 나올 리 없다. 중국을 찬양하는 드라마를 중국 바깥 시청자가 볼 리도 없다.

전 세계인이 즐기는 콘텐츠에 한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담아낼 공간은 없다. 드라마가 아니라도 긍지를 가질 일은 많다. 궁지에 몰린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재빠르게 데려와 안전하게 살도록 돕는 일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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