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은 파괴와 친구가 아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지난 주말에 <오늘의 어린이책 1> 전시를 보려고 책방에 갔다가 산책 나온 개 잔디를 만났다. 잔디는 열세 살이고 사람이었다면 이미 할아버지다. 잔디는 책을 한 바퀴 쓰윽 둘러보더니 이 정도는 다 안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앉아서 햇볕을 즐기기 시작했다. 잔디의 가족 중에는 동화작가가 있기 때문에 책 냄새는 익숙할 테고 어느 개보다도 다독가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은밀한 지면에 인간의 책에 기록된 개의 삶에 대한 서평을 기고하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그때 책방에 온 어린이 손님이 잔디 앞에 섰다. 요즘 말을 배우는 참이라서 “이쪽!” “포도!” “두 살!” 정도의 간단한 표현만 쓸 줄 알지만 “멍머!”라고 또렷하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잔디는 곧바로 어린이를 바라보았다. 어린이가 활짝 웃었고 서로 다정함을 나누었다. 잔디 할아버지가 그 책방 안의 어느 어른보다 이 어린이를 더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린이는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은 어린이에게 너그럽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이 약자들 사이에 흐르는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우리는 다른 존재를 동등하게 생각하는가, 고통을 목격하면 얼마나 염려하는가, 나 아닌 이의 일로 어디까지 함께 슬픈가?”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어린이는 어른들과 약간 다른 마음의 결을 보여준다고 느낀다. 어린이를 어른이 잃어버린 낙원이나 순정한 고향쯤으로 집단 칭송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격동 속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저마다 다 다른 개별적 존재이다. 그러나 어린이를 관찰하다 보면 어린이 시기를 지나기 때문에 발현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어린이 마음의 특징은 무엇일까. 어린이는 바꾸기에 소질이 있다. 루시드 폴이 ‘문수의 비밀’이라는 노래를 발표했을 때 듣자마자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노래가 될 수 있겠다고 짐작했다. 노래 속에서 반려견 문수는 자신을 길러주는 아빠가 없을 때 TV도 보고 파인애플도 꺼내 먹으면서 빈자리를 마음껏 누린다. “바꿔서 한 번 해보자!”는 문수의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이다. ‘내가 다른 존재라면 어떨까 상상하기’ 부문이 있다면, 어린이가 실력자일 것이다. 김동수 작가가 이 노래를 그림책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강아지 문수는 확실하게 서사의 중심을 차지한다. 책을 보면 사람들의 눈에는 눈동자가 없지만 강아지와 다람쥐, 비둘기에게는 눈동자가 있다. 현실에서는 약자인 동물들이 상상의 놀이에서는 표정과 시선의 생동감을 되찾고 세계의 주체가 된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서사는 이처럼 전복적인 서사다. 놀이에서나 이야기에서나 부당한 권력에 자신을 내주는 내용은 환영받지 않는다. 어린이는 모험으로 기존 권력을 역전시키는 전복적인 순간을 사랑한다.

어린이의 바꾸기 재능은 마음의 영역에서도 발휘되곤 한다. 동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저 고양이도 나만큼 아플 거라는 마음, 내 친구도 나만큼 슬플 거라는 안타까움 속에서 발견된다. “괜찮아?”를 묻는 진심 앞에서 우리는 어린이를 쉽게 이기지 못한다. 어린이들은 놀다가 이기고 지기도 하지만 놀이이기 때문에 세상보다는 안전하고 어린이는 그 안전한 사고 실험 속에서 공감을 배운다. 놀이의 긴장감 속에서도 친구와 저릿저릿하게 마음이 통하던 어떤 순간의 경험을 잊지 못하면서 남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라난다.

어린이들의 놀이가 대중매체에서 인용되면서 화제에 자주 오르내린다. 놀이하다가 지면 죽는다는 말도 우습게 오간다. 이왕 놀이를 회상하자면 어린 시절 우리는 왜 놀이를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친구의 손을 잡았는지에 대해서 기억하는 일이 늘어나면 좋겠다. 동심은 파괴와 친구가 아니며 굴종의 정당화를 싫어한다. 세계를 생성하는 방향에 서는 것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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