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선언 향한 초혼과 냉소

종전선언을 두고 열정과 냉소 그리고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며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유엔 총회에서 심중에 남아 있던 모든 열정을 담아 평화의 불씨를 지핀 이래 종전 논의가 되살아났다. 게다가 이번주에는 대통령이 교황 면담을 통해 종전선언을 위한 바티칸 순방 외교에 나선다고 하니, 향후 교황 방북 등 여러 가지 이벤트가 종전을 앞당기는 수레가 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종전선언을 향한 이 같은 ‘열정’은 대북 특사 성 김의 방한으로도 더욱 불붙고 있다. 우리 고위 당국자가 워싱턴에서 종전선언 문안이 논의 중이라며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를 내비친 이후인지라 그의 방한에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시국에 방한한 성 김이니 그의 입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게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성 김이 방한 일성으로 “북한이 이런 도발과, 불안정을 야기하는 행동을 그만두고 대화에 나서기를 촉구한다”라고 성명을 냈다. 지난 9월 중순 이래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도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제조건 없이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화전 양면식 언술도 잊지 않았다. 미사일 발사 중단이라는 ‘조건’을 붙인 논법이 분명한데도 그 스스로는 ‘조건 없는’ 대화라는 언술을 고집한다. 이래서 성 김에 관한 한, 그의 전문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냉소가 따라붙는다.

2008년 냉각탑 폭파 당시 북한 영변을 다녀오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의 오랜 경력은 만감을 교차하게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그는 전략적 인내의 아이콘이었다. 2015년 1월에는 그의 평양 초청과 회담 장소가 쟁점이 되어 북·미 회담이 결렬되기도 했다. 북한은 당시 ‘미국 것들과는 더는 상종할 용의도 없다’는 성명을 내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지난 5월 조 바이든 대통령이 그를 대북 특사로 임명하였을 때, 북한의 반응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것도 이런 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소’론은 인도네시아 대사를 겸직하고 있는 그가 임지로 가는 길에 개인적 용무로 들렀을 뿐이라며 그의 방한을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냉소론자들은 종전선언이 이미 죽은 놈이며 종전론은 한국의 자가 발전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바이든 정부는 이미 전략적 인내로 돌아갔고 북한 역시 남북관계에 미련이 없으며 오히려 북·중동맹론에 한층 기울었다고 본다.

하지만 ‘기대’를 버릴 일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존 볼턴 전 보좌관은 2018년 싱가포르 회담 당시 북·미 간에 종전선언 합의문을 담은 초안이 만들어졌다고 폭로했다. 볼턴은 ‘식스 피엠 문안’(six p.m. text)이라 불리는 장문의 합의문을 자신이 주도하여 밤새 뒤집었다고 자랑한다.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을 합의안에 추가할 것을 강변하여 장문의 합의안을 난도질했다는 것이다. 결국 주지하다시피 최종 합의안은 종전선언안이 모두 빠진 속 빈 강정 같은 합의문이 되었다고 안도한다. 볼턴의 공과를 별론으로 한다면, 분명한 점은 북·미 간 종전선언에 대한 합의 초안이 있었음이다. 그리고 당시 그 초안을 합의한 실무진에 성 김이 있었음 또한 분명하다. 성 김 특사가 당시 합의했던 종전선언 초안을 자구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제시한다면 북한의 동의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이나 백신 상황이 급속히 호전되고 있는 점 또한 북한을 대화로 불러낼 수 있는 유인책을 제공할 제법 큰 여력이 생겼음을 말한다.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 평양 방문 카드라도 하나 더 쥐게 된다면, 남·북·미 사이의 오해를 풀어내는 금상첨화의 중재자를 조력자로 갖게 되기도 한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개최하는 중국 역시 베이징 평화프로세스를 이어가는 것에 부담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려’의 소리가 더 높다. 우리 야당은 종전선언이 혹여나 대선에 영향을 줄까 걱정이다. 일본은 종전선언이 유엔사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결합고리가 약화될까 전전긍긍하는 기색이다. 아마도 성 김은 한국 야당이나 일본의 이런 강력한 우려도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 내에서는 혹여나 종전선언이 대북 유화정책이라는 비판의 소리를 들을까 고심하고 있다.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국의 체면이 손상되는 그 형식에 대한 우려가 더 큰 듯하다. 아직은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고 대북 정책이 외교관(blob)들의 손아귀에만 놓여 있어 선이 굵은 외교가 되지 못한 탓인 듯하다. 이래서는 북한이 사고를 쳐야 대통령이 관심을 갖게 되는 벼랑 끝 외교의 출현을 피할 수 없게 마련이다. 도발하지 말라며 도발을 부르는 제재만능론(one trick pony)에 대한 자성의 소리에 주목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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