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는 몸짓들

심수봉 노래를 듣는 사람의 표정은 낭만적이다. 화선지에 먹물이 떨어져 스미는 것처럼 잠시 굵게 맺혔다가 서서히 번지는 목소리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감정을 만든다. 나는 괜히 사연을 가진 사람처럼 아련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미세한 떨림으로 증폭되는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비련에 휩싸인다. 내가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을 때, 심수봉이란 이름은 이미 한 장르를 뜻하는 것이었다. 재즈, 포크, 트로트, 발라드…. 내가 구분할 수 있는 음악들을 조금씩 머금은 심수봉의 노래에는 테두리가 없었다. 어떤 가수들은 ‘가수’라는 단어 앞에 장르를 붙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라벨로 사용할 수 있는데 그것 또한 심수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지난달 19일, KBS에서 방영한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은 36년 만에 개최된 심수봉의 텔레비전 쇼였다. 객석이 있어야 할 자리만큼 확장된 무대 위에 심수봉이 오도카니 서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40년이 넘은 노래는 수도 없이 내 귀에 닿았지만, 부르는 얼굴을 마주하고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드론 카메라가 고공낙하를 하더니 무대의 크기를 측정하듯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일직선으로 날았다. 심수봉의 모습이 점처럼 보였다가 코앞에 오기도 하고, 정수리가 보였다가 옆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마치 내가 바람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역동적인 화면이었다.

나는 가끔 누가 만들어 놓은 진부한 이미지를 사랑한다. 그것에 도전정신이 결여되었거나 새롭지 않을지라도…. 그러니까 ‘심수봉쇼’를 기다리면서 예상했던 그림 속에는 ‘드론 카메라’는 없었다. ‘사랑밖에 난 몰라’를 부를 때 등장한 심수봉의 20대 시절 증강현실 홀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텅 빈 객석 대신 시청자의 거실에 연결된 화상통화 화면이 쉴 새 없이 등장할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노래에 몰입을 할 만하면 낯선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응원하는 모습이 등장해 흐름을 뚝뚝 끊었다. 나는 ‘심사모’의 회장이 된 것처럼 혀를 찼다. 도대체 뭐야. 심수봉이라는 가수한테 저런 연출이 꼭 필요해?

나는 2018년부터 클럽을 빌려 K팝 디제잉을 하는 ‘슬픔의 K팝 파티’라는 공연을 기획하고 있다. 규모가 작은 라이브 공연은 쾌적한 장소와 숙련된 기술 인력을 확보하고 나면 대부분의 준비가 끝난다. 퍼포먼스가 화려하지 않은 디제잉 공연은 더욱 그렇다. 디제이와 디제이 사이를 이어주는 간단한 연출 외에 나머지는 관객의 호흡과 반응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화되는 팬데믹 상황에 따라 공연은 방송으로 전환되었고, 플랫폼 관계자는 디제이가 돋보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디제이들에게 특이한 코스튬을 입히고, 100분 남짓한 공연에 계속해서 서사를 부여하고, 밤을 새워 세트와 소품을 만들고, 쉴 새 없이 춤을 추는 댄서도 섭외했다. 시청자의 시선을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고 시도했다.

몇 개월간 공연 콘텐츠가 방송이 되었을 때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방식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나는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의 이런저런 시도들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드론도 홀로그램도 모두 관객이 없는 공연을 ‘오디오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다. 온라인 콘서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기획자들이 공연을 방송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지금, 공연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소위 ‘방송적 유희’를 만들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은 과연 있을까? 공연계의 정상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방송으로서 고민을 경험한 이후 라이브 공연들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지’ ‘경연이나 서바이벌이란 포맷을 거치지 않고도 공연 자체가 방송이 될 수 있는지’와 같은 시대적인 가능성들이 몹시 궁금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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