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公論) 또는 공론(空論)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칼럼]공론(公論) 또는 공론(空論)

선거철이 아니더라도 이른바 ‘일요일 질문’이 거의 정기적으로 전화선을 타고 종종 내게도 온다. 독일에서는 선거가 항상 일요일에 있기에 ‘이번 일요일에 선거가 있다면 어느 당에 투표하느냐’라는 한결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선거와 관련된 여론조사가 예견한 결과와 너무 동떨어진 사례가 자주 발생하기에 여론조사를 도대체 믿을 수 있는지를 두고 벌어지는 논란은 여전하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물론 모든 여론조사가 그렇다는 식으로 싸잡아 비난할 수 없을 정도로 실제 결과에 아주 근사한 사례도 있다. 앙겔라 메르켈 여성 총리의 16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마감하고 처음으로 사회민주당·녹색당·자민당으로 구성되는 연방정부가 출발할 수 있게 하는, 지난 9월26일 있었던 의회선거의 결과는 많은 여론조사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여론조사의 역사에서 재앙적인 사건이라고 흔히 거론되는, 1936년 있었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확실한 승자로 여겨졌던 공화당의 랜턴은 민주당의 루스벨트에게 36.5 대 60.8로 패배했다. 미국 특유의 선거인단 구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더 벌어져 8 대 523까지 되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했던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조사 방법이 낳은 결과다. 전화와 자가용 번호를 표본 선택에 사용했기에 대공황 이후 힘든 상황에 놓였던 많은 루스벨트의 지지자들은 별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론조사는 일기예보처럼 날씨의 전체적인 흐름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을 단면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를 둘러싼 시비가 끊이지 않는 책임은 여론조사의 표본과 집계 산출에서 나타나는 오류에도 있지만, 여론조사를 도구 삼아 여론을 편향적으로 해석하거나 각색하는 언론에 더 있다.

‘플랫 포럼’이 정치적 공론 확장 속
디지털 시대의 끼리끼리 문화로
‘공론의 공론화’ 우려감 높아져
대선서 새 정치적 공론의 장 열려
한반도 평화 위한 공론 다졌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수많은 대선과 관련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보도에 물려서 더는 여론조사를 믿지 못하겠다는 시민도 그런 여론조사 결과에 그래도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이는 여론조사 결과가 정치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대표성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여론조사를 거치면서 공론(公論)이 연출되는 과정은 대다수 의견이 곧 공론이며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일반적 통념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선거 관련 여론조사의 3분의 1 정도가 예측에 실패했음에도 선거철만 되면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이를 의뢰한 각종 매체가 경마장에서 현장을 생중계하는 것처럼 부산을 떤다. 하지만 수준 미달의 여론조사 업체들을 미리 걸러내고, 또 이에 관한 정보를 선거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는 중요한 일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흔히들 민주주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선거가 부실하거나 편향된 여론조사 때문에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왜곡되거나 굴절된 여론은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급속하게 번진다.

일반적으로 공론은 개인적인 의견과 달리 사회 성원의 대다수가 이에 동의하고 또 이의 규범적인 힘도 인정하기에 18세기 이후의 서구 민주주의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독일의 사회학자 페르디난트 퇴니스(1855~1936)는 공론은 근대 이전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과 같다고 평가했다. 대체로 보아 공론의 위상과 기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주된 흐름이 되었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인간의 본래적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루소는 공론도 자유스럽게 태어난 인간을 묶는 하나의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공론은 통찰이 없는 의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쇼펜하우어는 깎아내렸다.

이와 함께 공론 형성 과정에 나타나는 힘의 관계에 특별히 주목하며 공론 형성을 주도하는 정치엘리트의 역할에 대한 문제도 제기하게 되었다. 이는 선거철만 되면 각종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이른바 전문가로 불리는 정치평론가나 정치학자들의 모습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여론이나 공론이 더욱 계몽적이며 높은 질을 지닌 대표성도 띠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공식적(公式的)인 것으로까지 인정되기도 한다.

‘지식이 사회를 오히려 멍청하게 만든다’는 주장과 함께 공론에 숨어 있는 이러한 지배적인 구조를 고발하는 움직임은 ‘68’의 저항운동이나 이를 뒤따른 ‘신사회 운동’ 속에서 ‘반(反)공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비록 일부 언론매체나 예술의 영역에서 일정한 정도의 자율적 공간을 확보했지만, 지속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정보혁명 때문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보 매체의 다양화와 더불어 여러 소셜미디어가 제공하는 ‘플랫 포럼’은 그간 거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독점된 공론장의 위계질서를 위협하게 되었다. 가령 코로나19에 대처하는 방법을 둘러싼 전문가나 정치인의 논쟁에 목청을 높이면서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백신 거부자’의 모습에서도 이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더 많은 소통의 가능성과 더 많은 개인이 참여하는 정치적 공론을 확충할 수 있으나 동시에 무정부적이고 끼리끼리 소통하는 마손된 공론을 구성하는 디지털 시대의 정치문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공론이 빈 수레처럼 요란하고 내용이 없는 공론(空論)이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이다.

의사소통 행위이론에 천착했던 하버마스도 정치적 공론의 새로운 구조 변화를 주제로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오늘날 분절(分節)되고 자기 안에서만 맴도는 메아리의 공간에서 나온 황량한 소음에 의해서 커다란 해방적인 약속은 압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신조어 ‘문빠’를 둘러싸고 이를 옹호하거나 비방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소셜미디어는 소통을 위한 플랫 포럼이 아니라 자기편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무조건 비난하는, 서로 거칠게 주고받는 비난이 난무하는 공간이 되었다.

독일 여러 지방에서는 저녁 노을이 질 때면 수천마리의 찌르레기가 동시에 늦가을 하늘에 온갖 모양의 수를 놓으며 떼를 지어 나는 현상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렇게 떼를 지어서 움직이는 이유는 개체들이 독수리나 매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더욱더 잘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물세계의 본능에 빗대어 정보사회의 이론에 원용된 ‘집단지성’이라는 용어가 있다. 개인이나 소수 전문가의 능력보다 다양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상호보완하는 집단의 지성이 더욱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소셜미디어의 세계에서 이러한 집단지성이 공론의 합리성과 보편성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지식인이 사회를 멍청하게 만든다는 비난에 못지않게 집단지성이 사회를 바보처럼 만드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집단 머저리’니 ‘디지털 모택동주의’라는 비판도 등장했다.

디지털 시대의 공론 형성을 두고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고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두면서 대선의 전초전을 장식하는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들여다보게 된다. 여론조사는 후보들의 개인사에 거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고, 정작 이들이 어떤 공약을 내걸었는지와 이의 실현 가능성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는 아주 부족하다. 혹시라도 정책에 관한 구체적인 발언이 후보자의 자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인지 몰라도 모두가 말을 아끼는 것 같다.

모두 자신만이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이를 공론의 장에서 검증할 기회는 사실상 없다. 선거라는 행사가 일단 끝나면 공약은 속 빈 강정처럼 남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선거를 통해 우리가 배운 유일한 것은 과거의 선거에서 배운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라는 경구조차 있게 됐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정치적 공론을 다질 기회가 당장에는 대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공론(空論)이 아닌 새로운 공론의 장이 열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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