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게임과 세컨드 찬스

송현숙 논설위원

보드게임 중에 ‘인생게임’이란 것이 있다. 룰렛에 나온 숫자대로 게임판 위를 돌며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에 진학한 뒤, 혹은 고교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가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집 사고 보너스를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 인생 스토리를 담은 게임이다. 1960년 미국에서 출시돼 세계 각국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보드게임의 클래식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유난히 눈길이 간 부분은 게임판 중간쯤에 있는 직업 바꾸기 코너다. 대졸 또는 고졸로 시작은 달라도 한곳에서 만나고, 또 재교육을 받아 연봉을 높이거나 직업도 바꿀 수 있다. 직업에 따른 연봉 차이가 씁쓸하긴 하지만 새로운 선택을 통해 인생 행로를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다. 순간 감동했다. 현실과 너무 달라서다.

송현숙 논설위원

송현숙 논설위원

패자부활이나 역전의 드라마는 스포츠와 영화, 게임에서만 갈채를 받는다. 현실에선 고졸과 대졸이 만나는 일, 다시 섞여 공부하거나 영업사원과 교사, 의사의 직업이 서로 바뀌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한번 벌어진 격차는 더 커질 뿐이다. 일단 안정된 자리를 획득한 이들은 문을 걸어 잠그곤 그들만의 성채를 높이 쌓는다. 성채 위에 올라 사다리를 걷어차곤 대대손손 이어갈 방법을 찾는다. 우리 사회 많은 영역에서 인생이라는 게임은 승자들이 룰을 만들고 승자 중심으로 돌아간다. 탐욕과 체념을 낳는 구조다.

지난해 국내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처음으로 800만명을 넘었다. 전체 노동자 중 38.4%로 2003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규모다. 임금격차도 최대로 벌어졌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을 겨우 넘는 수준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가량이다. 통계 기준이 달라 최소한으로 잡은 것이 그렇다. 대기업 임금을 100으로 봤을 때 중소기업 평균임금 비중은 1999~2019년 20년간 71.7%에서 59.4%까지 떨어졌다. 비정규직의 늪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1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율은 2004~2005년 15.6%에서 2015~2016년 4.9%로 급감했다. 이러니 기득권층이 세컨드 찬스(두 번째 기회)를 쉽사리 허용할 리 없다. 격차를 줄여야 세컨드 찬스도 자연스럽게 가능해진다. 배움터마다 일터마다 이동장벽이 낮아져야 자유롭게 이곳저곳 옮겨 갈 수 있다.

세컨드 찬스가 없는 우리 사회의 다른 이름은 불안 사회다. 한번만 발을 헛디뎌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일단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드니 불안지수, 울화지수가 높다. 다른 한편으론 사회 전체가 모험과 위험을 기피하는 복지부동 사회가 된다. 활력과 역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도, 사회 전체로도 불행하다. 최근 OECD가 2030~2060년 한국의 연간 잠재성장률이 1% 아래로 떨어져 38개 회원국 중 최하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것도 침체돼 가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터이다.

한국에선 새로운 꿈을 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해마다 수천명씩 세컨드 찬스를 찾아 해외로 이주한다. 자기 세대가 아니면 자녀 세대에서라도 삶이 달라지길 바라는 희망을 품고 떠난다. 이 땅에서 두 번째 기회들을 줄 순 없을까. 시험 한번 망쳤다고, 원하는 직장의 입사시험·승진시험에서 떨어졌다고,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사업에 한두 번 실패하거나 가게를 폐업했다고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10~60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나 재교육과 재취업의 문을 열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하고 마련해야 한다.

수능을 맞아 세컨드 찬스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다가온 ‘백세시대’에 스무 살도 안 돼 인생의 가능성이 한번의 시험으로 결정되는 사회는 얼마나 재미없고 단조로운가. 인생을 2모작, 3모작 하며 몇 번이고 다른 길을 택해 산책하듯 숲도 보고 나무도 볼 수 있다면 삶은 훨씬 다채롭고 풍성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외나무 타기에 가깝다. 수능에서부터 에베레스트산 등정하듯 비장하다.

아빠·엄마 찬스가 아닌, 사회가 주는 세컨드 찬스들이 인생의 단계마다 충분히 마련되어야 암울한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정책의 초점은 대기업과 스카이 대학들이 아닌, 임금노동자의 82.7%가 일하고 있는 중소기업과 대한민국 평균인 수능 4~6등급 정도에 맞춰져야 한다. 사회의 허리인 이들이 새 출발을 꿈꿀 수 있을 때 희망의 내일을 얘기할 수 있다. 아울러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지나친 탐욕과 체념도 함께 해결해야 우리 사회의 활력도, 생기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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