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서 너에게로, 우리를 위해

오수경 자유기고가

“누가 퀴어 아니랄까 봐….” 우연히 내 글에 관해 비아냥대듯 쓴 코멘트를 봤다. 워낙 ‘무플’에 익숙해서인지 그런 코멘트마저 고맙고 반가웠다. 늘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글을 쓰는 것 같아 고민했는데 내 글이 ‘퀴어’하게 읽혔다니 이보다 더한 칭찬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코멘트의 의도와는 달리 이 말이 나에게는 꽤 복잡하게 읽혔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오수경 자유기고가

“너 페미야?”라는 질문 앞에서는 늘 망설이게 된다. ‘메갈’로 보일까봐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나이브한 페미니스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퀴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본래는 성소수자나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었지만 요즘에는 보다 포괄적 개념으로 쓰인다. 성소수자가 아니어도 ‘퀴어’일 수 있고,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아도 ‘페미’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페미니즘과 퀴어에 관해 배우며 나라는 존재가 참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여성으로서 차별적이고 부당한 경험을 꽤 많이 한 약자이지만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적 성취를 어느 정도 이룬 강자이기도 하다. 가부장제의 관습을 체화했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지향성이 끊임없이 맞선다. 성별, 나이, 출신 지역과 학교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나를 이해하는 일은 타자인 ‘너’도 복합적이라는 걸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같은 여성이지만 비혼인 나와 기혼인 친구의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이성애자와 퀴어의 세계도 다르다. 사회는 그렇게 서로 다른 구성원의 다양한 정체성과 경험이 교차하며 구성되는 곳이다. 이 다름과 차이를 이해해야 나와 너를 넘어 ‘우리’의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너에게로 가는 길>은 ‘퀴어’ 영화인 동시에 자녀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비비안’과 ‘나비’가 자신을 돌아보고, 자녀라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모두의 인권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는 운동가로 세계를 확장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퀴어라는 정체성이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겠으나, 누구든 생긴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나와 너를 이해하며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모두의 인권을 위한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내는 과정이 오히려 정도(正道)임을 이 영화는 일깨워준다.

서로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며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생각하며 제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만 잘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경험할 수 있다. 그 노력 중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다.

솔직히 ‘페미’가 사라진다고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이 올 것 같지도 않고, ‘퀴어’가 삭제된다고 이성애자들의 천국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장애인이 거리에 안 보인다고 없는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처우에 차등을 둔다고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내 권리가 빼앗길 리도 없다. 그 반대다. 차별금지법으로 생기는 유익이 더 크다. 차별당하는 소수뿐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다수도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망설일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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