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서 말할 권리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버스도 만원이다. 흔들리고 부딪치며 타고 내린다. KTX 기차도 승객들로 가득하다. 거리 두기는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에선 철저하고 좁은 실내 공간으로 들어오면 쉽게 무화된다. 시내 백화점과 쇼핑몰, 카페와 음식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야구장에는 구름관중이 모였다는 소식도 들린다. 미세먼지 속 옥외 전광판에는 ‘위드 코로나’와 함께 ‘신규 확진자 3000명 돌파’ 뉴스가 나온다. 시골에 살다가 오랜만에 도시에 나오면 어지럽다. 거대한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다. 괴이한 모습이지만,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괴이함을 평범하게 받아들이라는 것, 그게 ‘단계적 일상 회복’의 의미일까.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소비활동은 장려하지만 정치활동은 엄금한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회복해야 할 일상 목록에 들어 있지 않다. 코로나19와 함께 살도록 가장 먼저 열리는 공간은 소비의 공간과 소비를 떠받치는 노동의 공간, 그 공간들을 연결하는 이동의 공간이다.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인간, 돈을 빌리고 돈을 갚는 인간이 살아 있어야,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 돌아간다. 금융자본주의를 돌리려면 그 땔감인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게 해야 하지만, 그 체제에 의문을 갖고 저항하는 인간은 퇴치해야 한다. 야구장과 백화점은 모여도 괜찮고, 거리와 광장은 안 되는 이유다. 서로 상관없는 사람들이 각자 모였다 흩어질 공간에는 1만명도 괜찮지만, 함께 모여 말하는 정치적 존재는 10명도 불허다. 소비지향적 집합과 사익추구적 집단행동에는 관대하나 소수와 약자의 권리 투쟁과 공공적이고 민주적인 요구를 내건 단체행동에는 엄혹하다.

그래서 집회와 시위는 금지다. 위드 코로나와 함께 집회 규정도 완화되어 당국은 백신 2차접종 완료자에 한해 ‘499명’까지, 미접종자가 섞여 있을 경우는 ‘99명’까지 허용한다. 집회 재개 방침을 마치 집회의 자유를 되찾은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499와 99라는 숫자는 무슨 기준인지 납득되지 않는다. 499명으로 신고한 우파 집회는 허용되고 99명으로 신고한 민주노총 집회는 불허되기도 한다. 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선별적 허가는 얼마든지 발생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집회 허가’가 당연시되는 것이다. 집회는 허가의 대상이 아니다. 헌법 21조는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감염병 예방’을 명분으로 질병관리청장과 지자체장에게 집회 등 집합 금지와 제한 조치를 허용하는 감염병예방법 49조2항은 집시법과 헌법을 무력화하는 코로나19 시대의 계엄령이 되었다. 서울시는 노동자 대회 집회 참가자를 전원 감염병예방법 위반혐의로 고발했다.

노동자대회가 열린 11월13일, 서울 시내에는 경찰 차벽이 등장했다. 청계천의 전태일 동상은 경찰병력으로 철통같이 에워싸였다. 50년 전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쳤던 노동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여기서 똑같은 말을 외치는 노동자들은 감옥에 가둔다. 2015년 촛불광장에 차벽이 등장했을 때 그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정부의 반(反)헌법적 경찰 차벽에 의해 가로막혔다”고 비판하고 “차벽으로 국민을 막을 것이 아니라 국민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며 책임자 엄벌을 요구했지만 지금은 차벽으로 정권을 수호한다. 촛불광장에서 ‘착한 시민’들이 보여준 차벽에 대한 관용은 오늘의 침묵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다시 광장에서도 말의 자리가 없는 이들에게서 공론장을 박탈한다.

“우리 이제 이거 못 벗어요.” 택시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냐는 대화에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라는 조언이었다. 그에게 재난은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지 끝날 것이 아니다. 마스크 한 장에 의지해 날마다 오늘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를 건너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저 말이 그날 들은 가장 슬픈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더 슬픈 말을 들었다. ‘마스크를 쓰고라도 돌아다닐 수 있던 그때가 좋았다’고 말할 때가 올 수도 있을 거라고. ‘다른 세상은 오지 않는다’는 신자유주의적 주술은 가망 없는 자본주의를 참 오래도 연명시켜왔다. 코로나19 이후 어린이들은 마스크를 불편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지켜줄 신체 일부로 여긴다고 한다. 일방적 비대면 수업 방침에 불만을 표하던 대학생들도 이제 대면 수업을 기피한다. 고립을 두려워하고 연결을 갈구하던 시민들도 줌 회의와 온라인 주문에 익숙해져간다. 그럴수록 모여서 말해야 한다. 어디서 말하란 말이냐, 함께 외쳐야 한다. 한번 빼앗긴 자유와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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