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슬로운과 아마추어 공수처

정제혁 사회부장

영화 <미스 슬로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입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 승자는 상대보다 한 발짝 앞서서 회심의 한 방을 상대보다 먼저 날려야 하죠. 상대를 놀라게 만들되, 상대에게 놀라선 안 됩니다.” 총기규제 입법 로비스트인 주인공의 이 ‘로비스트 철학’은 대반전의 서막이자 영화의 클라이맥스이다. 적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는 명대사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슬로운의 말에서 ‘로비스트’라는 주어를 ‘검사’로 바꾸어도 어색하지 않다. 무엇이 수사의 중심이고 주변인지, 줄기이고 가지인지, 어디가 급소이고 변죽인지 보는 눈은 경험과 직관이 어우러진 통찰에서 나온다. 수사는 심리전이다. 피의자는 혐의를 감추고, 검사는 혐의를 밝힌다. 피의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결정적인 패를 적시에 흔들어야 방어태세가 무너진다. 심리전의 전제는 탄탄한 수사이다. 증거와 주변 진술을 갖고 있어야 심리전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수사력이란 사건의 핵심을 짚고 증거를 찾는 능력은 물론, 그렇게 확보한 증거를 활용하는 능력까지를 포함한다.

<미스 슬로운>의 프로페셔널리즘을 떠올린 것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아마추어리즘과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공수처가 출범한 지 1년이 되어 간다. 지금까지 공수처가 거둔 성과는 공수처가 출범했다는 것밖에 없다. ‘고발 사주’ 수사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안쓰러울 정도이다. 공수처는 고발 사주 핵심 피의자인 손준성 검사에게 3전3패를 당했다. 처음에는 체포영장이, 다음에는 구속영장이, 그다음에는 재청구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또 한 명의 핵심 인물인 김웅 의원실에 대한 압수수색은 법원에서 위법 판정을 받았다. 압수수색으로 확보한 자료도 없어 보이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종이 쪼가리 하나 법정에서 쓸 수 없게 됐다. 정점식 의원실에 대한 압수수색도 별무소득이었다. 이 사건 제보자 조성은씨가 고발 사주를 폭로한 지 3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공수처가 새롭게 밝힌 것은 거의 없다. 문제의 고발장을 누가, 어떤 경위로 작성했는지 아직도 특정하지 못했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지 못한 수사는 핵심을 맴돌며 변죽만 울리는 중이다. 그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성적표가 손 검사에게 당한 3전3패이다.

벽에 막힌 수사를 돌파하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벽을 통째로 부수고 나가는 유형이 하나라면, 약한 곳을 골라 정교하게 칼질하는 유형이 다른 하나이다. 공수처의 모습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다. 방에 들어가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고, 일어나다 다시 모서리에 머리를 찧고 사주를 경계하는 슬랩스틱코미디에 가깝다. 수사 전문가인 ‘피의자 검사’들이 이 어설픈 수사를 가만둘 리 없다. 공수처가 하는 족족 딴지를 건다. 압수수색을 하면 압수수색의 적법성을 다투고, 불러 조사하려고 하면 조사 일정을 협의하자고 버티고, 불러 조사하면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진정한다. 이 싸움에서 상대의 패를 읽고 상대보다 먼저 일격을 가하는 쪽은 공수처가 아니라 피의자 신분인 전·현직 검사들이다.

‘아마추어 공수처’는 당연한 귀결이다. 공수처 인력 구성과 공수처법이 그렇게 돼 있다. 공수처 검사 23명의 평균 수사 경력은 2.2년에 불과하다. 김진욱 공수처장은 판사 출신이다. 수사 경험은 조폐공사파업유도 사건 특검팀에서 잠깐 일한 것 정도다. 수사를 총괄 지휘하는 여운국 차장도 판사 출신이다. 검사 출신은 5명에 불과하다. 공수처법은 수사 경험이 없어도 공수처 검사에 임용할 수 있게 돼 있다. 공수처는 검찰을 견제하려고 만든 기구이다. 검사의 비리를 수사하고, 검찰이 도맡아 하던 고위공직자의 범죄를 수사하라고 만든 곳이다. 검찰이 대학생 수준이라면 공수처도 대학생 수준은 돼야 한다. 그래야 검사의 비리를 제대로 수사할 수 있고, 고위공직자 범죄에 대한 국가 수사 역량의 총량이 줄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의 공수처는 초등학생 수준이다. “우리 공수처는 아마추어”라는 여 차장 말 그대로다.

필요한 건 ‘유능한 공수처’이지만 정부·여당은 고민하지 않았다. ‘닥치고 공수처’식 언사가 넘쳤다. 공수처를 만들면 금세라도 세상이 바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은 없다. 공수처를 시중의 조롱거리로 내버려둘 것인가. 공수처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논의를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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