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과 한 알의 희망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석과 한 알의 희망

“아랫집에서 팥죽 쑤었다며 문을 두드려, 주공 뵙다 화들짝 놀라니 꿈이었구나. 땅속에서 우레가 울리니 큰 과일이 뒤집히고, 우물 밑바닥에서 양기가 나와 큰 물레를 돌리네.” 고려시대 문인 이곡이 동짓날 지은 시의 일부이다. 공자는 꿈에 늘 주공을 뵐 정도로 주나라 초기의 바른 도를 회복하고자 염원하였다. 이곡 역시 꿈에 주공을 뵙다가 이웃이 동짓날 팥죽을 보내오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음양의 이치로 보면 온통 음밖에 없는 때이다. 하지만 음이 가장 창성한 바로 그때 양이 아래에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주역>에서는 다섯 개의 음효 아래에 하나의 양효가 있는 복괘(復卦)가 이에 해당하는데, 세 효씩 나누어 보면 땅() 아래에 우레()가 있는 형상이다. ‘큰 과일’ 즉 석과(碩果)는 박괘(剝卦)의 맨 위에 놓인 양효를 상징한다. 박괘는 복괘와 반대로 다섯 개의 음효 위에 하나의 양효가 있는 모양이니, 이것이 뒤집히면 복괘가 되는 셈이다.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를 기록한 <예기 월령>에 의하면 동짓달에는 샘물이 일렁인다. 옛사람들은 이를 양기가 바닥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큰 물레’라고 풀이한 홍균(洪鈞)은 물레 돌려 질그릇 빚듯이 하늘이 만물을 만드는 조화를 비유한 표현으로서, 정권을 쥐고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위 시에는 동짓날 새로 차오르는 양기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모든 것이 암울하기만 한 때, 절망의 바닥에서 새로운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희망이다. 하지만 끝없이 갈마들며 운행하는 자연처럼 우리의 삶도 그러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곡이 복괘의 날에 박괘를 떠올린 뜻을 다시 생각한다. 온통 음이 득세하는 가운데 가지 끝에 달려 아무에게도 먹히지 않고 남아 있는 석과 한 알. 그것이 없다면 종자마저 끊겨버려 미약하게나마 다시 바닥을 차고 오를 한 가닥 양기조차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제 손으로 홍균을 돌려보겠노라고 나선 이들에게서 도무지 희망을 찾기 어려운 이때, 바른 도의 회복을 염원하며 남겨두어야 할 석과 한 알을 어디에서 구할까.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