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변희수

이범준 사회에디터

1975년 4월9일 새벽,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박정희 정부는 피고인 8명 전원의 사형을 집행했다. ‘사법역사 암흑의 날’로 국제법학자회가 선언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이다. 나머지 피고인도 유죄를 받아 7명이 무기징역, 8명이 징역 15~20년이 확정됐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진실이 드러났다. 국가정보원은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이범준 사회에디터

이범준 사회에디터

이듬해인 2006년 인혁당 사건 피해자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서울중앙지법은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해 손해배상을 판결했다. 당시 국가소송 대표자인 법무부가 상소해 대법원까지 사건을 가져가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최고법원에서 확정해 리딩 케이스(leading case)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상소가 돼도 유족은 배상액을 가집행할 수 있고, 피해자는 이미 고인이라는 설명도 덧붙었다.

노무현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못했다. 국가의 상소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다. 피해자 유족의 고통을 하루빨리 끝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인혁당 사건 다른 유족이 뒤이어 제기한 손해배상 사건을 항소해 고등법원으로 가져갔다. 이수근 간첩조작 사건, 서창덕 납북어부 조작 사건 등에서도 그렇게 했다. 법리가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적대적으로 소송을 벌였다. 그제서야 리딩 케이스를 만들어야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육군 제5기갑여단 변희수 하사는 2019년 성전환수술을 받았다. 계속해서 여군으로 복무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육군은 심신장애 판정을 내리고 전역을 결정했다. 변희수 하사는 인사소청을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행정소송을 냈는데 첫 재판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전지법은 전역 처분이 부당하다고 지난 10월 결정했다. 국방부는 대법원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며 법무부에 항소 지휘를 요청했다.

이번에도 항소를 포기하라는 여론이 잇따랐다. 정의당은 “당장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항소는 양심이 있다면 즉각 포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참여연대는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은 고인의 명예훼손을 중단하고 항소를 포기하라”는 성명을 냈다. 결국 박범계 법무장관은 항소 포기를 지휘했다. 외부위원 6명, 내부위원 1명인 행정소송 상소자문위원회 의견을 고려한 결과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법무부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사건 판결은 성전환자의 군복무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취지가 아니고, 이 사건 처분 당시 여성이었던 망인에 대해 음경상실, 고환결손 등을 이유로 한 전역 처분은 관련 법령 규정에 비추어볼 때 위법하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따라서 성전환자의 군복무 인정 여부는 관련 규정의 개정 검토, 군의 특수성 및 병력 운용, 국방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 국민적 공감대 등으로 종합해 입법적·정책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리딩 케이스를 대체할 입법이 가능할지 의문이지만, 된다 해도 대법원 판결만큼 섬세하게 성소수자를 보호하기 쉽지 않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이던 2007년 기간제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기간제법이 시행됐다. “기간제 근로자를 2년 초과해 사용하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 본다”고 기간제법은 정했다. 그런데 1년11개월째에 계약을 종료하는 일이 속출했다. 기간제법이 오히려 기간제 노동자를 위협한다며 이 법을 없애달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를 대법원이 해결했다. 기간제법 10년째인 2016년 권순일 대법관이 갱신기대권을 만들어 판례로 확정했다. “근로관계를 둘러싼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근로계약이 갱신된다는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근로자에게 그에 따라 근로계약이 갱신될 수 있으리라는 정당한 기대권이 인정되는 경우에 근로계약의 갱신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해고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효력이 없고, 이 경우 기간만료 후의 근로관계는 종전의 근로계약이 갱신된 것과 동일하다.”

동성혼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대만이 도입한 계기는 입법·행정이 아니라 사법이다. 사법원이 2017년 “동성혼을 금지하는 민법은 위헌이므로 민법을 개정하라”고 판결했다. 미국에서도 연방대법원이 2015년 “헌법이 정하는 기본권이자 사회질서로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판결해 동성혼이 가능해졌다. 제2의 변희수가 나오지 않도록 대법원 판단을 요구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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