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은 없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일상을 이기는 혁명은 없다. 고정관념을 깨기란 어렵다는 의미다. 젠더 문제가 유독 그렇다. 한 페미니스트는 “시작과 종말이 동시에 진행됐던 게 페미니즘 역사”라고 말했다. 젠더 평등이 달성됐다며 페미니즘 임무 완성을 말하거나, 젠더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남성이 차별의 희생자가 됐다고 선언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죽지도 않았는데 장사부터 지내려 드는, ‘페미니즘 사망 증후군’이라 할 만하다. 이 증후군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대가를 이번 대선에서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제1 야당 대표는 안티페미니즘에 올라타 있고, 집권 여당은 등가일 수 없는 남혐과 여혐을 동시에 배격하자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이 나오고 군대 안 가는 여성에게 권리 4분의 3만 주자고 한 인사가 4년 만에 재등장했다. ‘이대남·이대녀’ 갈등은 빈부 양극화만큼이나 심각하다. 여성에게 참으로 가혹한 대선이다. 조동연 교수 논란은 특히 가혹했다. 가부장제라는 고정관념에 여성 개인을 겨냥한 ‘폭력’까지 가해진 사건이었다. 쏠 준비를 하는 순간 모든 게 과녁이었다.

구혜영 정치에디터

구혜영 정치에디터

‘혼외자·불륜’ 프레임이 강고했다. 젠더 문제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믿는 편이다. 세상사는 심각한 한두 문제를 수백 번 겪은 경우, 사소한 수백 가지 문제를 한두 번 정도 겪은 경우 등 그야말로 다양하다.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주고받았을 상처…. 이를 제3자가 단죄하는 건 폭력에 다름 아니다. 평론가 신형철은 ‘사람과 사건의 실체를 최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는 모든 태도’를 폭력이라고 했다. 조 교수가 ‘기울어진’ 결혼 생활이었다고 했을 때 직감했다. 부부간 신의는 어떻게 생기고 깨지는지, 신의가 깨진 책임을 여성에게만 물을 수 있는 건지 섣불리 속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성의 과거를 폭로하면 응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혼외자·불륜 프레임’에 ‘기만’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었다. 조 교수가 물러난 뒤에도 ‘성폭력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명백한 폭력이자 혐오다.

다음 과녁은 정치인의 개인사가 공적인 일이라는 화살이었다. 불미스러운 개인사를 숨겼으니 집권여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론 자격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결혼 ‘제도’는 공적 영역이지만 개인의 결혼은 사생활이다. 사생활이 공직의 결격 사유일 수는 있다. 약자에 대한 착취가 개입됐을 때다. 그러나 조 교수 개인사에 이런 일이 있었나. ‘숨 죽이며 살았다’는 고백은 고통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는 항변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법조 출신 한 여성 의원이 ‘국민 감정’이라는 말을 꺼냈다. 아픈 상처를 10년 넘게 감내하며 잘 지내던 사람을 영입 인사라 치켜세우더니, 그 인사가 공직과 관계없는 개인사로 만신창이가 된 때였다.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시끄럽고 골치 아파지니 깨끗이 손절하는 데 국민 감정을 이용한 것이다. 국민 감정이란 칼날은 한 여성의 개인사를 난도질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여성이 쌓아올린 성취까지 부정하는 기제가 됐다. 흠 있는 여성이 어마어마한 자리에 오르려면 자기 노력이 아닌 다른 무엇에 기댔을 거라는 편견이 꿈틀댔다.

한 여성에 대한 혐오는 필연적으로 여성 집단을 향한다. 이번에도 이 공식은 빠지지 않았다. 조 교수 사건에 “여성단체는 뭐하냐”고 분노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았다. 여성들이 평소 목놓아 외치는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을까.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 침해가 발생했을 때 “장애인단체나 노동조합은 뭐하냐”는 말은 없거나, 있더라도 미미한 수준이다. 그런데 여성 문제에 관한 한 여성들은 뭐하냐고 한목소리로 합창한다. 정말 부당함을 느낀다면, 여성단체 찾기 전에 남성 스스로 나서주면 안 되나.

조 교수를 내려놓으며 여성에게 지독히도 가혹한 이 대선 터널을 어떻게 지나야 할지 고민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은 2015년 동성혼 합법화 판결 후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시대의 기후. 여성의 삶에 대한 신임(하지 않는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 투표를 제안하고 싶다. 여성과 가족을 묶어 돌봄노동 족쇄를 여성에게만 채우려는 후보, 압도적으로 많은 성폭력보다 희귀하기 짝이 없는 무고부터 엄벌하겠다는 후보. 여성들이 “이런 후보에겐 투표하지 않겠다”는 캠페인을 하면 대선 전에라도 세상은 바뀔 것이다. 그래야 후보들도 ‘그날의 날씨가 아닌 시대의 기후’를 고려하게 될 테고. 나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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