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와 만난 헬조선의 서사

김선영 TV평론가
지옥

지옥

포스트 코로나 원년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2021년,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변이를 거듭하고 이제는 ‘위드 코로나’가 당연해진 시대가 되었다. 바이러스 못지않게 심각한 위협은 팬데믹 상황의 장기화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다. 코로나19 범유행은 우리 사회 시스템의 취약점을 전면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재난 2년차에 접어들자 그 그늘은 한층 짙어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위기가, 뉴노멀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될지 아니면 퇴행으로 가는 길이 될지 알 수 없는 불안의 시기를 통과 중이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한국 드라마는 이 같은 사회의 위기의식을 신속하게 재현해온 장르였다. 지난해부터 급부상한 재난과 종말의 서사가 그 예다. <킹덤: 아신전>(넷플릭스), <다크홀>(OCN), <해피니스>(tvN), <지옥>(넷플릭스·사진) 등과 같은, 장르로서의 디스토피아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디피>와 <오징어 게임>(이상 넷플릭스)처럼 한국 사회의 절망적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작품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올해의 디스토피아 서사들은 기존의 ‘헬조선 서사’가 팬데믹 시대를 만나 발전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2010년대 중반 등장한 신조어 ‘헬조선’의 정서를 담아낸 드라마들의 핵심은 만연한 사회불평등과 이를 조장하는 기득권 집단에 대한 분노였다. 여말선초 시대를 배경으로, 착취당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시선을 통해 망국의 좌절과 한을 드러낸 <육룡이 나르샤>(SBS, 2016)가 대표적이다. 최근의 디스토피아 서사는 이 같은 불평등이 코로나19 유행으로 더욱 악화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제일 심각한 것은 양극화 심화 문제다. 팬데믹의 장기화는 경제·고용 충격이 저소득층과 같은 취약계층에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뜻하는 ‘코로나 디바이드’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극심한 양극화 문제를 대두시켰다. 올해 한국 드라마 속 디스토피아 상상력은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의식을 토대로 한다.

예컨대 <오징어 게임>은 경제적 취약층이 막대한 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이를 오락으로 즐기는 VIP 집단과 제일 먼저 탈락하는 약자의 수직적 게임 구도로 양극화의 현실을 은유했다. <해피니스>는 양극화 심화의 디스토피아를 직접적인 장르로 풀어낸다. 코로나19 종식 뒤, 또 다른 감염병이 창궐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해피니스>는 재난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계급 갈등을 그린다. 고층의 일반 분양 주민과 저층의 임대주택 주민이 뚜렷이 구분된 극의 중심 공간은 좀비보다 소름 끼친다. 계급 차별이 공고화된 뉴노멀 시대야말로 이 드라마가 그리는 최악의 디스토피아다.

혐오의 심화와 확대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경제적 취약계층 가운데서도 가장 아래층에 위치한 집단은 이주민, 장애인, 고령자 등 그 사회의 혐오와 차별의 대상과도 겹친다. 올해의 디스토피아 서사는 코로나19 범유행이 악화시킨 이들의 현실을 조명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킹덤: 아신전>이다. 주인공 아신(전지현)과 그의 부족은 같은 종족인 여진족에게도, 그들이 세금을 바치는 조선으로부터도 핍박받는 집단이다. 가장 낮은 피지배계층이 주인공으로 나서면서, 이 작품은 기존 오리지널 <킹덤> 시리즈가 그렸던 백성들의 경제적 재난 위에 인종차별적 재난의 비극까지 더한다.

<오징어 게임>의 또 다른 주요 인물 새벽(정호연)과 알리(아누팜)에게서도 같은 비극을 목격할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인 새벽과 이주노동자인 알리의 고난에는 한국 사회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 계층의 현실이 정확하게 재현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지옥>은 이 혐오의 확산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드라마는 인간에게 천사라 불리는 초현실적 존재가 나타나 지옥행을 통보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타인을 함부로 낙인찍는 사회의 공포를 그려냈다. 인간들이 지옥행을 선고받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통보를 받은 즉시 그는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만다.

돌이켜보면 올해 K드라마의 대약진에는 이 같은 주제의식이 팬데믹 시대의 글로벌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주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적 현실을 토대로 삼은 헬조선 서사가 이제는 세계인이 공감하는 디스토피아 서사가 되었다는 것이 지금 이 시대가 낳은 가장 큰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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