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절망과 디스토피아 서사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청년의 절망과 디스토피아 서사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두 번째 게임 ‘설탕 뽑기’ 에피소드에서 등장한다. 참가자는 진행 요원의 지시에 따라 게임에 앞서 세모, 동그라미, 별, 우산 등 네 개의 문양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곧이어 그들이 진행할 게임이 ‘설탕 뽑기’라는 사실이 공개되자, 선택한 문양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세모를 선택한 이들은 쉽게 게임을 통과하지만, 우산을 선택한 그룹에서는 탈락자가 속출한다. 탈락자들의 비명과 유혈이 난무하는 가운데 게임 종료를 몇 초 남기고, 문제의 그 장면이 나온다.

김선영 TV평론가

김선영 TV평론가

우산을 선택했다가 설탕 뽑기에 실패한 남자가, 사살당하기 직전에 진행 요원의 총을 빼앗아 인질극을 벌이는 장면이다. 참가 번호 119번, 노상훈(윤돈선)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진행 요원 하나를 인질로 잡고 절규하듯 소리친다. “이런 좆 같은 게임이 어딨어? 누구는 왜 좋은 거 뽑고 누구는 왜 안 좋은 거 뽑아야 돼?” 미동도 하지 않고 총을 겨누는 나머지 진행 요원들 앞에서, 노상훈은 인질에게 가면을 벗으라고 요구한다. 이윽고 그가 민낯을 드러낸다. 앳된 청년의 얼굴이었다. “너같이 어린 놈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충격을 감추지 못한 상훈은 갑자기 총구를 제 얼굴로 돌리고 죽음을 택한다. 얼굴이 노출된 청년 역시 사살당한다.

이 장면은 감독이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힘주어 연출한 신이다. 원래 상훈은 첫 번째 게임이 끝나자마자 이 ‘미친 게임’을 중단하자고 앞장서 주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간 뒤 그 역시 결국엔 게임 속으로 되돌아오기를 선택한다. 그만큼 절박한 인물의 극단적 선택을 받아들이려면, 그의 충격이 시청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야 한다. 감독은 그 결정적 장면을 가면 속의 앳된 얼굴 하나로 설득해낸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단지 한 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이 잔혹한 세상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무기력한 ‘청년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 열풍 뒤에 ‘한국 청년층의 좌절감’이 있다고 분석한 미국 외교문서 속 구절을 하나의 표정으로 압축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황동혁 감독은 이 작품을 구상한 배경에, 금융위기 이후의 한국 사회, 특히 가상통화에 올인하는 청년들의 현실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해고당한 ‘아버지’들의 눈물을 양산했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청년층의 불안을 야기했다. 극단적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현실은 3포 세대로 시작해 N포 세대로 점점 나빠졌다. 여기에 코로나19 위기까지 겹치며, 좌절은 더욱 심화된다. <오징어 게임>은 이 같은 청년층의 암울한 현실과 접속했다.

의아하게도 정작 <오징어 게임>에는 청년들이 게임의 주요 참가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주요 참가자 중에는 강새벽(정호연)이 유일하고, 좀 더 넓히면 새벽과 소통한 지영(이유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을 청년세대의 초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새벽은 위기의 탈북민, 지영은 성폭행 피해자라는 특수한 설정이 더 강조된다.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이 한국 중년 남성의 실패한 초상을 대변하는 것과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던 청년들은 실패한 또 다른 중년 남성 노상훈 앞에서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예의 그 체념한 표정으로. 실제로 <오징어 게임>의 진행 요원은 여러 면에서 무기력한 청년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들 대부분은 ‘일꾼’으로 불리며, 현대 청년층의 상징적 거주 공간인 고시원과 똑같은 구조의 방에서 생활한다. 일꾼들이 사망자를 지게차로 나르는 모습은 요즘 청년층의 대표적인 일자리로 떠오른 택배 물류창고 노동 현장을 꼭 닮아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노동을 착취당하는 이들은 <오징어 게임> 생태계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집단이다.

이러한 설정은 서글프지만 <오징어 게임>의 아쉬운 요소이기도 하다. 게임의 규칙에 분노하고 규칙을 위반하는 이들이 모조리 중년 남성으로 설정된 사이, <오징어 게임>의 흥행 동력이 된 청년들의 모습은 가면 뒤 말 없는 표정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오징어 게임>이 진짜 디스토피아 서사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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