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 아바타’ 윤석열

김민아 논설실장
김민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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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이하 윤석열)가 지난 8일 기자들과 만나 “뭐든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이라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전날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올린 것과 관련해 배경을 묻자 내놓은 답이다. 그는 지난해 경선 당시 여가부를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고 업무와 예산을 재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입장을 바꾼 이유와 일곱 글자만 쓴 까닭에 대해선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았다.

“뭐든지…” 발언 후 두 시간쯤 지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이하 이준석)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여가부 해체 공약 및 여러 정책의 명쾌한 정리 과정을 보며 많은 분이 속도감 변화에 궁금해한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바뀐 체계를 보니 보람이 있다.” 전날엔 윤석열의 ‘일곱 글자 페북 글’을 보고 “웃음을 터뜨린 것으로 알려졌다”(연합뉴스).

본래 윤석열은 “아홉 가지가 달라도 정권교체라는 한 가지만 같으면 모두 힘을 합쳐야”(지난해 12월24일) 한다고 강조해왔다. 이른바 ‘반문재인 빅텐트론’이다. “기존 국민의힘과 생각이 다른 분이 온다고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아니다”(지난해 12월20일)라며 페미니스트 정치인 신지예씨를 새시대준비위원회에 영입하기도 했다. 20~30대 남성의 지지세를 확장하고 60대 이상 기존 지지층을 한데 묶어 40~50대를 포위하자는 이준석의 ‘세대 포위론’에는 줄곧 부정적이었다. 지난 5일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을 내치고 6일 의원총회에서 이준석과 껴안은 뒤 급선회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발표는 두 사람의 포옹 후 21시간 만에 나왔다. 원희룡 선대본부 정책본부장도 몰랐다고 한다.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흘쯤 지나 뉴욕타임스(NYT)에 삽화 한 컷이 실렸다. 얼굴 아랫부분에 트럼프를, 윗부분에 트럼프의 오른팔로 불리던 백악관 수석전략가 스티브 배넌을 합성한 그림이다. NYT는 삽화와 함께 ‘배넌이 대통령인가?(President Bannon?)’라는 사설을 실었다. NYT는 “트럼프의 (취임 직후) 폭풍 같은 시간에는 모두 배넌의 흔적이 있다”면서 극단적 반이민 정책 등을 배넌이 주도한다고 비판했다. 극우 성향 인터넷매체 브라이트바트뉴스 창립자인 배넌은 2016년 트럼프의 대선 레이스가 위기에 빠졌을 때 캠프에 들어가 CEO를 맡았다. 이후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를 주도하고, 공화당 내 반대파까지 거칠게 공격하며 트럼프의 신임을 얻었다.

윤석열은 지지율이 급락하자 중도 확장을 포기하고, 트럼프식 갈라치기 쪽으로 노선을 변경한 것 같다. 온라인 공간의 일부 남초(男超) 커뮤니티에서 ‘준스톤’으로 떠받드는 이준석을 ‘윤캠프의 배넌’으로 모시면 자신도 트럼프처럼 이길 수 있으리라 믿는 모양이다. 그는 9일에도 배경 설명 없이 “병사 봉급 월 200만원” 한 줄만 페이스북에 올렸다.

일곱 글자에 “웃음을 터뜨리고” “보람이 있다”며 득의만만하고,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여가부 존폐를 놓고 토론하자는 이준석을 보면 누가 진짜 후보인지 헷갈린다. 윤석열은 조만간 헬멧 쓰고 도시락 배달도 할 예정이다. 이 또한 이준석이 낸 ‘연습문제’라고 한다(중앙일보).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9일 페이스북에 “윤석열 후보는 이제 충실한 ‘이준석 아바타’로 분화했다”고 썼다. 주권자는 ‘김종인 감독’의 디렉팅에 따라 ‘연기’하는 후보도 싫어하지만, 누군가의 ‘아바타’는 더 질색한다. 5년 전 탄핵당한 전직 대통령 이야기까지 꺼낼 필요는 없으리라.

선거는 과학이다. 윤석열의 지지율이 떨어진 건 여가부를 존치하겠다고 해서가 아니다. 수많은 실언과 가족 관련 의혹,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태도 탓이다.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은 존재와 언어로써 주권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다움’이다. 마트 가서 멸치와 콩을 사들이는 ‘멸공 퍼포먼스’는 대통령다움과 거리가 멀다.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는 첫 공식 TV토론이 다음달 21일 열린다. 윤석열은 여가부 개편론에서 폐지론으로 돌아선 데 대해 논리와 근거를 갖고 시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 “병사 봉급 월 200만원” 공약을 언급하며 개병제·모병제에 대한 철학도 함께 피력할 수 있을까. 공약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떠나, 자신의 공약을 자신의 언어로 전달하기 힘든 후보는 곤란하다. 윤석열이 “제가 이준석 아바타입니까?”를 외치는 사태는 없기 바란다. 진짜 세상은 이준석의 세상보다 크고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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