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을 마주하는 법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귀농 연습 3년차. 퇴근 후 귀농학교에 다녔다. 경남 다랑논에선 손으로 모를 내다 거머리에 기겁하고, 호남평야에선 콤바인으로 벼를 베다 앞날(디바이더)을 부러뜨릴 뻔했다. 농약 없이 텃밭 농사에 나섰다가 벌레들에게 배추를 다 헌납했다. ‘프로’ 농부들에겐 가소로운 수준이지만, 귀농 연습생 중에서는 ‘만렙(최고 레벨에 도달하는 것)’을 찍지 않았을까. 연습생 딱지 떼고 농부로 데뷔할 날도 머지않았다. 내 딴엔 일생일대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지하게 내게 묻는 이들은 정년 앞둔 선배들뿐이다. “어디 살 만한 지역은 있어?”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이재덕 뉴콘텐츠팀 기자

‘살기 좋은 곳’이란 뜻의 ‘생거(生居)’가 붙은 지역들이 있다. 부안 사람들은 ‘생거부안’을 말하고 진천에선 ‘생거진천’이 진짜라고 하는데, 저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이라고 하니 누가 원조인지 가리기도 어렵다. 그래도 진천 이월면 사당마을을 가보면, 생거진천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500년 된 마을 앞에는 넓은 논이 있고,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찬 북서풍을 막아준다. 주민들은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칠장천 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는다. 고작 10여가구이지만 95세 최고령 할머니부터 몸이 조금 불편한 10대 고등학생까지 함께 돌보며 산다. 몇 년 전엔 두 가구가 귀촌하면서 마을에 활기가 생겼다. ‘또 올게요’ 약속했던 서울여대 농활팀은 지난가을에도 와서 주민들의 일상을 다큐 영상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이번에도 ‘2022년에 뵐게요’라며 주민들에게 편지를 남겼다.

올해도 사당리서 농활 할 수 있을까

농활팀은 올해 가을에도 올 수 있을까. 이 마을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충북도와 진천군은 마을과 뒷산, 농지를 모두 갈아엎고 ‘테크노폴리스’라는 이름의 산업단지(77만4015㎡)를 만들기로 했다. 토지 수용을 위해서는 지주 50% 이상이 동의해야 하는데, 이미 65%가 수용에 찬성했다. 이들은 대개가 마을 사람들이 아니다. 농촌에도 일자리가 필요하고 산단을 무조건 막을 수만은 없지만 벌써 19번째 산단이다. 진천군은 이미 23번째 산업단지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메가폴리스산단(137만5693㎡), 진천복합산단(124만5404㎡), 스마트테크시티(178만8936㎡)…. 진천 인구는 89개월째 늘고 있다. 인구 9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면단위 농촌 지역을 산단으로 만들고, 읍에는 사람들이 살 아파트단지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군은 인구 3만명인 진천읍을 5만명으로 늘려 시로 승격시킨다는 목표까지 세웠다. “사당리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마을”(진천군수)이다.

‘지역소멸지수’는 통상 ‘65세 이상 인구 대비 20~39세 여성 인구’로 계산한다. 노인은 지역의 부담이고, 젊은 여성은 출산을 담당한다는 간단명료함이 너무 노골적이라 불쾌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지수가 0.2 미만이면 ‘고위험지역’으로 분류하는데, 20~39세 여성이 없는 사당마을의 소멸지수는 ‘0’이다. 60대 초반 부부가 귀촌해 주말마다 마을 잔치를 벌여도, 대학생들이 찾아와 시끌벅적하게 농활을 해도, 주민들이 함께 김장을 하며 즐겁게 살고 있어도 소멸지수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소멸위기지역으로 분류되는 경남 남해로 간 청년들은 남해에 사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소멸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가 잘 존재하고 있는지 슬며시 물어보는 것”(해변의 카카카, <우리가 소멸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존재하는 이야기를 소멸시키려 하는 건 시 승격을 위해 산업단지를 유치하는 진천군이고, 충청 메가시티를 구상하는 충북도이고, 농업진흥구역을 해제해 준 농림축산식품부이고, 산단을 지으라고 재촉하는 외지인들과 지역 유지들이다. 진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역소멸을 막겠다며 전국 농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소멸지역 주민 “우린 이렇게 산다”

농민들에게 농사지어 먹고살 수 없게 하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소농들을 몰아내고, 태양광 발전을 해야 한다며 논 부치던 사람들을 내쫓는 지역이 수두룩하다. 농촌의 작은 학교는 비효율적이라며 통폐합하고, 마을 소방서와 우체국은 비용을 이유로 없애고 있다. 끝내 주민들마저 쫓아낸다면 그야말로 소멸한 땅이다. 마음 편히 살 만한 지역이 없다면 나도 만년 귀농 연습생일 수밖에 없다. 사당마을 주민들은 매일 아침 진천군청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소멸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날마다 “우린 이렇게 산다”고 외친다.


Today`s HOT
보랏빛 꽃향기~ 일본 등나무 축제 연방대법원 앞 트럼프 비난 시위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