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갈등’에 숨겨진 욕망

최성용 청년연구자

“여자만 밤길 걷는 게 무섭냐? 남자인 나도 무서우니까 그만해라!” 예전에 보았던 댓글인데 인상적이라 기억에 남았다. 공중화장실, 택시, 밤길 등을 젠더에 따라 다르게 경험한다고 토로한 어떤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최성용 청년연구자

최성용 청년연구자

고백건대 남성인 나 역시 밤거리를 걸을 때 불안감을 느낀다. 실제 봉변을 당한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불안과 경험이 다른 이에게 “그만해라”라고 말할 근거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나라면 “남자인 나도 무서운데, 여자들은 얼마나 무서울까”라고 말할 것이다. 내겐 이게 상식적인 사고의 흐름으로 느껴진다. 밤거리가 불안할 수 있다는 걸 안다면 다른 이의 불안 역시 더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그 댓글은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여성들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하려 노력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오늘날 언론과 정치권은 이런 태도를 ‘젠더 갈등’이라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긴다. “그만해라”라고 말하는 ‘이대남’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자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젠더 갈등을 부당한 프레임이라 지적해왔다. 프레임은 없던 것조차 사실로 만들고 승인한다. 젠더 갈등이란 단어는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동등한 두 집단이 갈등하는 구도를 상상하게 한다. 이는 일부의 여론과 정서를 청년세대 전체의 것인 양 과잉 대표하게 만들뿐더러, 젠더 관계가 권력관계라는 점을 놓친다.

물론 남성이라고 폭력과 차별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성도 밤길이 무섭고,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남성을 여성과 똑같은 피해자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남성의 피해 경험은 젠더 권력관계의 반례가 아니라 젠더 외 다른 사회적 권력관계들의 증거다. 이유는 다를지라도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다들 나름의 폭력과 차별을 겪는다. 다만 그래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람마다 피해의 맥락이 다르더라도, 피해의 경험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경청하고 공감하도록 이끌어준다. 이때 피해 경험은 반목과 적대의 근거가 아니라 이해와 연대의 조건이 된다. 반면 젠더 갈등 프레임은 남성을 여성과 동등한 피해자로 만들어 여성들 목소리의 정당성을 끌어내리려는 욕망에 호응한다. ‘여성이 피해자라면 남성도 피해자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자기들만 피해자라며 목소리를 내는 건 괜히 유난 떠는 일’이라 말하고픈 것이다. 이때 남성들의 피해 경험은 여성들을 끌어내리기 위한 불쏘시개로 전락한다.

나는 내가 겪은 여러 폭력과 차별의 경험이 여성들의 피해 경험과 목소리를 끌어내리는 데 쓰이도록 동의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언론과 정치권은 ‘갈등’의 프레임으로 대립을 만들고 혐오를 승인하고 있다. 그럴수록 사회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나보다 약한 자를 짓밟아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불행한 곳이 될 것이다.

더 나은 공동체를 비전으로 제시하는 데 무능한 정치는 혐오에 기대어 적을 설정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에 매력을 느낀다. 혐오정치는 여성에서 시작해 성소수자, 이주민, 노동자 등 그 목록을 늘려가며 지지율을 확보하고자 한다. 자신을 뽑아야 할 이유를 제시할 능력이 없는 후보일수록 그렇다. 젠더 갈등은 이를 은폐하는 대표적인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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