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승리, 학교급식 10년의 진보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우리는 별 감흥 없이 당연하게 누리고 있지만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정책들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유튜브 동영상으로 보게 된 국내 친환경무상급식 실태가 그 한 예다. “이런 식사가 매일 나온다고?” “게다가 돈도 안 낸다고?” 한국 공립학교의 급식 재료와 메뉴, 조리 과정을 소개하고 다른 몇 개국의 급식을 비교하는 내용이었는데,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외국인들의 반응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한국 학교급식의 높은 수준은 한국 체류 경험이 있는 외국인들을 통해 꽤 오래전부터 화제가 되어왔다고 한다.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송현숙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대선이 코앞이라, 무상급식이 선거의 주요 이슈가 됐던 2010년 6·2 지방선거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선거의 강력한 슬로건 중 하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을, 우리 농민에게 희망을’이었다. 안전하고 질 좋은 먹거리를 차별 없이 제공하자는 친환경무상급식 요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급식조례 제정운동이 지자체마다 들불처럼 번져가던 상황이었다. 이에 맞서 재벌 자녀까지 무료로 주느냐, 퍼주기식 복지 하다간 나라살림 거덜난다는 반론이 불붙었지만 결과는 무상급식 공약의 판정승이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한나라당이 유리할 것이란 선거 전망을 뒤엎은 주요인 중 하나가 무상급식 이슈였다는 당시 평가엔 대체로 이견이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 보편복지 이슈가 점화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시민들 사이에서 복지는 인권의 문제이며 시혜가 아닌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서울시장 당선 1년 후 당시 오세훈 시장은 전면적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발의하며,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무상급식을 “얼치기 좌파들이 내세우는 좌파 포퓰리즘”이라 비난하며 색깔론까지 씌웠지만, 분출하는 복지 요구 앞에 낡은 주장은 힘을 잃었다. 보편적 복지 확대는 시대정신이었다. 이후 정부와 각 지자체에선 무상보육, 무상교복, 청년수당, 아동수당, 기초노령연금 확대 등의 정책이 거침없이 진행 중이다.

선거를 앞두고 “이번 선거, 대선은 망했다”는 ‘이선망’ ‘이대망’이란 자조가 끊이지 않는다. 희망이 없어서다. 정치·외교·경제·산업·교육·노동·환경 등 사회 모든 분야의 대전환기, 창의적인 발상으로 미래를 헤쳐가야 할 과제가 산적한데 비전과 정책이 실종된 사생결단식 정치싸움만 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진절머리가 난다. 가장 빠르게 소멸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 속에 ‘헬조선’이란 말도 과장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통계만 보면 대한민국은 가장 부유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경제 순위 세계 10위, 수출액 규모는 세계 7위다. 공식적인 선진국 대열에도 들었다. 시민의식 투철한 훌륭한 국민들도 있다. 늘어가는 쓰레기에 죄책감을 느끼고, 규칙 준수가 몸에 밴 시민들, 옳은 길을 찾아 실천하는 시민들이다. 나라가 어려우면 금을 팔아 보태고, 콩 한쪽까지 나눠먹는 시민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바꿔놓고 불행한 국민들을 만든 건 선의를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이용만 해온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이번 대선의 키포인트는 시민들과 공감하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늘 시민들이 빨랐고 옳았다. 미래의 길을 이끌었고 잘못 가더라도 돌이켜 길을 찾았다. 그러니 시민들의 요구에 때맞춰 응답만 해도 정치는 성공한다. 지난 10여년 시민들이 이뤄낸 학교급식의 눈부신 진보가 살아 있는 증거다. 나라가 망할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내 아이,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는 데 ‘진심’인 시민들이 나서 상생의 방안을 찾아냈다. 짧은 기간 비약적인 발전에 세계가 주목하는 정책이다. 오랫동안 무상급식 정책을 연구해온 김흥주 원광대 교수는 한국의 무상급식을 한마디로 “가성비, 가심비가 좋은 정책”이라고 평가한다. 먹거리 운동에서 시작했지만 일자리 창출, 생산 농가와의 상생, 학부모·학생 영양교육 등 생각지 못했던 효과들까지 더해지며 공동체의 연대의식도 강해지니, 비용 대비 경제적·심리적 만족도가 높은 정책이라는 의미다.

제2, 제3의 성공한 정책들도 가능하다. 선거까지 며칠 남지 않았지만, 그동안이라도 후보들이 역대급 비호감 선거전에 지친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길 바란다. 어제보다는 나은 내일을 위해 희망의 불씨라도 살렸으면 좋겠다. 모든 구성원들의 마음을 모으는 저출생 대책, 다양한 시민 의견이 정치와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개혁 방안부터 ‘진심’을 보여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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